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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일대기의 단면 211226 일

수호자007 2021. 12. 19. 08:45

제2부 축복이 이어지는 교직생활 첫째.

짧은 시련과 긴 축복 1. 통영에서(통영수고,아내;23세) 우리 결혼생활의 처음 한 해는 나의 학교생활의 황금기였다.

독일어와 영어를 가르치며 학교의 대외 이미지를 위해 중요시하던 40인조의 블라스 밴드의 운영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밴드의 운영은 중요한 직책이었다. 필수과목인 독일어의 지도교사도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였다.

기수와 기순 두 동생을 대려고 와서 함께 있었지만 신혼의 첫 해는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기만 했다.

11월에는 첫아이 보라가 태어났고 다음해 4월에는 진주고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경사의 연속이었다.

 

2. 진주에서(진주고, 24세-27세) 진주고로의 발령은 참으로 의외였다.

당시로선 육성회비 수당이 촉석루 앞 남강 봉급보다 많았으며 이 수당이 2배 이상 차이가 나는 학교로의 영전이었다.

통영수고를 방문한 장학사 한 분이 독일어와 영어를 가르치며 블라스 밴드를 담당하고 있는 수학 교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진주고에서는 전공인 수학을 담당하며 우리의 가정생활도 정상이 되었다.

조그마한 방 한 칸을 전세 얻어 살았지만 행복했다.

 

진주에서 둘째 딸 강은이가 태어났고 학교를 퇴근할 때면 아이를 엎고 길가에 나와서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의 나이 24세 때다. 우리 평생에 영화를 가장 많이 본 시기다. 개봉영화와 지나간

영화 등 시간만 나면 영화 보러 갔다. 연세대 영문과의 성호 처남도 진주에 와서 우리와 함께 영화 "고엽"을 보고 간

 

일주일 후에 아깝게 담석증으로 요절 했다. 군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쳤고 육군병원에서 결핵이 치유되는 행운이

따랐고 군복무 기간 동안 그는 고성의 회화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봉급으로 가사를 도우기도 했다.

창녕에서 엄마 동생

 

3. 창녕에서(창년농고 28세-32세) 군사혁명이후 도시와 농촌의 육성회비 수당이 같아지던 1962년에 나는 고향에서

가까운 창녕농고로 학교를 옮겼다. 진주의 방 한 칸의 전세에서 살다가 창녕에서는 큰집을 전세 얻어 기순 기태 두 동생을 대려와 3년간 함께 살며 중 고교 공부를 시켰고 아래채를 남에게 또 전세로 주기도 했다. 창녕의 생활은 우리의 결혼생활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다. 어머니가 고혈압으로 두 번이나 넘어지셔서 창녕에서 나와 그의 간호로 치료를 받으셨고, 장마로 농촌의 보리가 싹이 터고 상해서 지독한 흉년이 든 해도 이때다. 그는 심한 황달증세로 소화가 안 되어 고생을 했다. 30일간 입원하고 있었던 통영의 적십자병원에서 간염이라고 진단된 그의 병은 담석증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부산대학병원에서 담석증 수술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어려운 수술이었다. 수술 후 그는 건강을 회복했고 건강이 회복되자 강숙이가 태어났으며 그의 인내와 우리 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고 다시 남들이 부러워하는 가정이 되었다.

 

4. 밀양에서(밀양여고 32세-36세) 그의 메모'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 우리는 진해고를 거쳐 밀양여고로 발령이 나서

밀양의 생활을 시작했다. 딸 셋을 낳은 후 첫 아들을 낳은 그해에 남편을 외국으로 보내고 학교에서 100% 지급되는 봉급으로 살면서 그는 희망에 찼으며 행복했을 것이다. 아랑각 방문 당시로는 그렇게도 유명하던 코티 분을 자주 항공으로 보냈으며 2년간 한 주일에 두 번씩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다시 연애시절로 돌아갔다. 거기서 받은 장학보조금은 당시 후진국인 우리나라로서는 큰 돈이었고 나는 이 돈을 아껴 집으로 송금했고 그는 이 돈과 봉급을 아껴 2년 후 내가 귀국할 때는 상당한 자금을 저축하고 있었다.

 

5. 마산에서(마산상고, 36세-41세) 1970년 9월에 귀국하여 다음 해 3월 나는 마산상고로 발령이 났다. 우리는 마산시청 근처에 전셋집을 얻어 아랫방은 간호학교 여학생들에게 전세를 주었으며 여기서 강숙이를 유치원에 보내면서 유치원

엄마들의 정보를 얻어 양덕의 공무원아파트를 사서 처음으로 내 집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우리가 재산을 모으게 된

첫 기반이 되었다.

 

6. 마산고등학교(아내 41세) 76년 3월 마산고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나이가 많은 수학과 세 사람이 마고에 몰려 지도하기가 어려운 3학년 공통수학을 내가 맡게 되고 그와 함께 일요일마다 열리는 방송통신고등학교의 책임을 맡게 되어 바쁜 교직생활이 시작 되었다. 그러나 교감승진이 나의 신분변동의 큰 과제가 되어 남처럼 뇌물은 못쓰고 기도에만 매달리는 처지였다. 아침마다 산에 올라가 냉수마찰을 하고 간절한 기도와 찬송을 이어가는 생활로 6개월이 지난 76년 9월,

나는 진해교육청 장학사로 승진이 되어 아내에게 큰 선물을 안겨주게 되었다. 내 나이 43세로 교사생활 19년 반이었고 정년을 22년 남겨놓은 때였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둘째. 젊은 날의 추억(아내;25-41세)

1. 밤참으로 먹던 냄비우동 진주고등학교에 근무하던 시절 진주의 밤거리에는

포장마차에서 파는 냄비우동 장사가 있었다. 긴 겨울밤에는 냄비우동이 더욱 인기가 있었다.

극장에서 밤늦게 돌아오는 사람이나 술 한 잔 하고 오는 사람들이 우동으로 요기를 하고 들어갔다. 우리가 살던 상봉동동의 밤거리에도 우리 집 가까이에 우동장사가 있었는데 겨울 밤 늦게 까지 둘이서 놀다보면 젊은 때라 시장하여 자주 냄비우동을 사러 갔다. 거기서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 냄비를 가지고 가서 사왔다. 겨울 밤 둘이서 먹던 그 우동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그 때의 그 냄비 우동 이야기를 하곤 했다. 특히 우리는 진주에서 영화를

많이 보았다. 두 개의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거의 모두 보았다. 극장이 끝나고 들어오다 보면 우동장사를 만나고

집에 와서 내가 냄비를 가지고 다시 나가 우동을 사오곤 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여섯 살 때의 추억이다.

 

2. 재산 1호 진주고교에 근무할 때다. 그때는 바느질도 많이 하던 때라 자노메라는 재봉틀이 인기였다. 그러나 비싼 값이라 교사들 중에서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평소 솜씨가 좋아서 바느질과 재단을 잘 하는 아내 때문에 우리는 이 재봉틀을 월부로 구입을 했다. 그는 재봉틀을 구입하고는 너무나 좋아했다. '재산 1호'라 불렀다. 많은 바느질을

이 재봉틀이 대신해 주었고 훗날 아이들이 넷이나 되자 옷을 직접 재단해 만들기도 했다. 그는 이런 솜씨는 보통을 넘어서는 재주가 있었다. 오래 동안 많이 이용해서 낡아서 못 쓸 때까지 15-6년간 가지고 있다가 버린 기억이 난다.

우리의 '재산 1호' 다.

 

3. 성호처남의 방문 60년 2월 초의 어느 날 아내의 두 살 아래 동생 성호 처남이 진주로 찾아왔다. 연세대 영문과를

다니는 수재였다. 낮에는 촉석루를 둘러보고 밤에 우리는 함께 극장에 가서 '고엽'이라는 영화를 보고 늦게 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잤다. 성호 산소에서 이튿날 그는 고성에 갔는데 열흘이 채 안 된 2월10일 그 동생이 사망했다는 연락이 왔다. 담석증으로 부산에서 수술 중 사망 했다는 것이다. 그는 슬피 울며 고성으로 달려갔고 바다가 보이는 가마등 산에 영원히 묻혀 잠들었다. 우리는 자주 '고엽'의 이야기와 성호 동생의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 왔다.

 

4. 군 입대 1960년은 3.15 부정선거와 4.19가 있고 사회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학교에는 대부분의 교사들이

군복무를 하지 않고 근무하고 있었는데 4.19이후 군사복무 미필자로 근무하기가 어려워 졌다. 나는 6.25 때 학도의용군으로 복무한 것이 있어서 이것으로 군복무 연기가 되어 왔으나 이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60년 12월 진주고교 교사 3명이 함께 지원하여 군에 입대했다. 나는 이 해 3월에 결핵을 앓았기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합격이 되었다. 입대를 예상하지 않았다가 입대가 되었으니 혼자 남은 아내는 많이 당황했을 것이다. 전세방을

불합격 되어 돌아온 동료교사에게 넘기고 적포 동생과 함께 고향 적포로 이사를 해 아이 둘을 대리고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5. 교사가 된 아내(아내;26-27세) 나의 고향에서 생활하던 아내는 결혼 전에 받은 교사자격증으로 9월1일부로 고성

배둔에 있는 회화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교장으로 계시는 장인어른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라가

네 살 강은이가 두 살 때다. 보라는 적포와 고성에 있게 하고 강은이와 식모아이를 대리고 배둔에 방을 얻어 새살림을

차리고 교사의 생활을 시작했다. 처녀시절에 꿈꾸던 교사로서의 새 경험을 쌓으며 보람도 있었겠다. 그러나 내가 1년

복무로 제대를 하고 진주고교에 다시 복직을 하고 형편이 좋아졌으나 그의 건강에 어려움이 생겨 식욕이 없고 소화가

안 되며 황달증세가 나타났다. 나는 고향에서 가까운 창녕농고로 근무지를 옮겨 하숙을 했고 자주 그를 방문했는데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62년 5월20일 사표를 제출케 하고 통영에 있는 적십자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6. 크로스워드퍼즐(십자말 풀이) 내가 군에 근무할 때 병원부대라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발간되는 유일한 월간 영어잡지를 사서 읽었다. 영어잡지 속에 상금과 일년 구독권이 걸려 있는 십자말풀이(crossword puzzle)가 출제되었는데 몇 개의 단어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었으나 완전하게 풀어서 '회화초등학교 교사 김애자'의 이름으로 잡지사에

제출했다. 두 달 후 잡지를 보니 김애자가 다른 한 사람과 함께 당선이 되어 발표되어 있었고 상금과 구독권이 학교로

전달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 후 아내에게 부산에 있는 한 청년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자기의 소개와 영어공부에 대한 자기의 열정이 적혀 있었다. 다음에는 만나기를 원하는 편지가 계속 되어 아내는 자기가 결혼한 부인이라는 것을 밝혔으나 소용이 없었다. 초등학교 교사가 그만한 영어 실력을 가졌으니 대단하다 생각하고 부인이라는 것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소포로 선물이 오고 교무실에서도 큰 관심사가 되었는데 자기가

외동아들이라면서 나중에는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결혼을 위해 준비한 화장품을 보내어 오기까지 했다. 당시로는 귀한 화장품이었다. 참으로 난처하게 된 아내는 상세한 긴 편지로 겨우 이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어 때문에

아내를 빼앗길 번한 일이었다.

 

7. 전화위복의 군 입대 나의 군 입대는 참으로 의외의 일이었다. 8개월 전에 결핵으로 폐에 공동이 생겨 3년은 입원치료를 해야 된다는 진단으로 약과 주사를 맞고 있는 중이었고, 아내의 둘째 오빠가 논산 훈련소에 중위로 근무하고 있어서 결핵이 확인되리라 믿었다. 그의 오빠는 나타나지 않았고 훈련이 시작 되었다. 결핵환자는 안정을 해야 하는데 고된 훈련과 내무반의 탁한 공기는 큰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부관학교를 거쳐서 제6야전병원에 배치를

받았다. 나는 결핵의 판정으로 쉽게 입원이 되었고 결핵전문병원인 경주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8개월 동안 좋은 시설과 약으로 치료하여 결핵이 완치가 되어 제대를 할 수 있었다. 치료비가 고가여서 결핵에 해로운 교사직을 그만 둘수도 없는 상황에서 상상을 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또 5.16 군사혁명으로 군에 가지 아니한 수많은 교사들이 집단으로 강제

소집이 되어, 내가 제대의 기쁨에 차 있을 때 교사들이 전방으로 전방으로 실려 가며 한없는 부러움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님이 특별히 도와주셨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8. 입원(아내 28세) 아내는 학교에 사표를 내고 식욕부진과 소화불량 황달증세로 통영에서는 가장 좋은 병원이라는

적십자병원에 입원을 했다. 진단은 간장염이라고 했다. 한 달 동안 입원을 해 치료를 받았으나 호전되지 아니했다. 실은 담석증이었는데 오진이니 호전될 수 없었다. 당시의 우리나라 의술이 그런 수준이었다. 내가 병원을 방문해 의사와 식사하며 치료와 관심을 부탁하기도 했다. 입원 한 달 후 퇴원하여 창녕에서 다시 새살림을 차렸다. 한 달의 병원비는 큰돈이었으나 그와 나의 봉급으로 부담 없이 지불할 수가 있었다.

 

9. 창녕 살림(아내;28-29세) 나는 하숙을 끝내고 다시 아기자기한 가정생활을 시작했다. 집 앞 가까운 곳에 동산이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아이들 손을 잡고 자주 산책을 나갔고 들판 길을 나가면 저수지가 있어서 휴일에는 이 저수지까지 자주

가족소풍을 나가기도 했다. 한 번은 바람이 불어서 손수건을 저수지 안으로 날려 보냈는데 강은이가 아직도 말이 서툴러서 "콘수건 날라갔다"고 하는 것을 듣고 둘이서 많이 웃은 기억이 난다. '콧물 닦는 손수건'을 합성한 '콘수건'이

너무 웃겼었다. 그러나 아내의 건강은 계속 좋지 않았다. 황달증세가 심해지고 식욕감퇴 소화불량으로 병원약과 좋다는 인진쑥을 아무리 달여 먹어도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아직 젊으니까 치료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치료를 계속했다.

 

10. 담석증 진단 황달증세는 날로 악화되어 갔다. 다행히도 우리가 나가는 창녕교회의 장로님이 의사였는데 그가 담석증을 앓고 있어서 아내의 병이 담석증이라고 확실한 진단을 했다. 그로부터 담석증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나 담석증 수술을 받다가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수술을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병명을 알았으니 현대의학에 의존

치료할 수밖에 없었다.

 

11. 담석증 수술(63년,아내;28세) 담석증 수술이 어려운 수술이라 나는 아는 의사들이 있는 경북대학병원으로 찾아갔다. 여러 의사들과 상담한 결과 수술은 꼭 받아야 하고 위험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 아내와 상의한 결과 그의 언니가 있는 부산대학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집도의사는 이형진씨로 정하고 수술을 받았다. 나는 가운을 입고 수술실에 끝까지 참석했다. 길게 배를 째고 갈비뼈를 천정에 달린 줄로 당겨 큰 수술이 진행되었다. 담낭을 제거하고 큰 담석을 세 개나 적출했는데 간에서 담즙이 흘러나오지 아니 한다는 것이다. 간장 속에 담석이 있으면 재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들이 담도를 통하여 조치를 하고 있을 때 간절히 기도를 했다. 기도를 끝내고 "아멘" 하는데 의사 이형진씨가

"아! 나온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적의 순간이었다. 수술 후 어려움이 있었으나 처형과 순호 처남의 도움으로 5.16 혁명 후 엄하던 학교근무와 어린 두 아이들에게 많은 지장을 주지 않고 수술과 회복을 병원에서 마칠 수가 있었다.

10개월의 봉급에 해당하는 수술비를 고향집과 학교에서 마련한다고 어려움을 겪은 나는 수고한 처형과 처남에게 제대로 감사를 표하지 못한 것이 큰 후회로 남았다.

 

12. 건강 회복 수술의 결과는 매우 좋아서 쉽게 회복이 되었다. 밥맛이 생기고 체중이 늘고 곧 아름다운 20대 여인의

모습을 되찾았으며 평소의 잘 웃고 밝은 성격이 되어 다시 즐거운 가정이 되었다. 1년 남짓 괴롭히던 황달증세의 고통이 일시에 없어졌고 한 번 씩 이러나던 복통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연애하던 시절 우리의 관계가 영영 깨어질 뻔 했던 그의 복통의 원인도 담석증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귀여운 두 딸과 함께 참으로 행복한 생활이 시작 되었다. 수술 후 2년이 지난 65년에는 강숙이가 태어났으니 모든 것이 완전 회복이 되었다는 증거였다. 13. 왕성한 식욕 수술 후 아내는

젊은 때라 식욕이 왕성하고 소화력도 매우 좋았다. 우리는 두 동생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입학시켜 함께 살고 있었고, 그의 집안 여동생 봉금이를 대려와 아픈 그를 도우며 함께 있었으니 식구가 7명 이었다. 더구나 이 해는 보리수확 철에 닥친 긴 장마로 인해 전국 농촌이 보리를 말리지 못해 보리가 싹이 트고 상하여 흉년이 든 해다. 봉금이가 밥을 할 때면 아내는 밥이 맛이 있어서 많이 먹고자 여러 번 "밥 많이 해라"고 당부를 했다. 그러나 봉금이는 알뜰한 아이라 밥을 항상 조금만 지었고 약간 상한 보리를 섞은 밥이라 냄새가 났지만 너무나 밥이 맛이 있어서 아내는 그 밥맛을 잊을 수가 없다고 여러 번 말하곤 했다. 일곱 식구 모두가 한창때라 다 많이 먹었지만 그는 평생에 가장 밥맛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의 나이 29세 때의 일이고 우리가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긴 해다.

 

14. 아들탄생 우리는 딸 둘로서 참으로 행복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풍조에서 나이 많으신 부모 특히 나의 어머니는

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은이가 출생한 5년 후에 태어난 숙이가 또 딸일 때는 그도 많이 섭섭했던 것 같다. 그는 아들 낳기를 많이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밀양에서 다시 임신을 하여 출산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68년 겨울방학 때,

여학생들이 나를 모시고 표충사와 그 주변 등산을 계획하고 있었다. 1월15일 여학생 5명이 모든 준비를 갖추어 아침

일찍 집에 찾아 왔다. 그날 오후 늦게 돌아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몸이 좀 이상하다"고 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출산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등산을 포기했다. 상황을 아는 그는 괜찮을 것 같다고 하면서 갔다 오라고 여러 번

말했으나 나는 학생들만 가게 했다. 고향에 연락하여 어머니가 오셔서 출산을 도와야 마땅한 시대였는데 또 딸일까 하는 걱정으로 그가 원하지 않아서 우리 둘이서 모든 것을 처리하자고 일찍부터 약속하고 내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의학서적을 사서 출산관계를 읽었고 탯줄 자를 가위와 소독약 솜 태반을 받을 기구와 새 수건과 이불 미역 쇠고기 등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그날 밤까지 무사하더니 밤 늦게부터 진통이 시작되어 새벽에 아들을 출산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이 갓난아기를 혼자서 목욕시키는 일이었다. 날이 추워서 아이 피부가 파랗게 변하고 미끄러워 잡혀지지 않아 물에 집어넣을 수도 없고 혼자서 매우 힘이 들었다. 앞집 아주머니를 깨워 미역국 끓이는 일을 부탁했다. 아들을 낳아서 기쁜 마음으로 참기름과 쇠고기를 넣은 미역국을 그는 많이 먹었다.

 

15. 외국유학(아내;33세) 밀양여고에 근무하던 68년, 아내 나이 33세 때 아들을 낳은 해의 일이다. 유럽의 베네룩스 3국 중의 하나인 '벨기에(벨지움)'란 나라에서 부룻셀대학원에서 공부할 과학계 교수나 교사 2명이 초청되어 과학기술처에서 선발하는 시험이 공고되었다. 영어나 불어의 시험이라 내가 응시를 했더니 51명의 응시자 중에서 대학교수 한명과 내가 선발되어 2년간 외국에서 최신 수학을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9월 출발하는 날 밀양여고의 전교생이 밀양역에 환송을 나왔으니 당시로서는 교수나 교사가 해외로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드문 일인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들을 낳은 그해에 남편을 외국으로 보내고 학교에서 전액 지급되는 봉급으로 살면서 그는 희망에 찼으며 행복했을 것이다. 당시로는 매우 유명하던 코티 분을 사서 자주 항공편으로 보냈으며 2년간 한 주일에 두 번씩 항공엽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리는 다시 연애시절로 돌아갔다. 내가 받은 장학금은 후진국이었던 우리나라로서는 큰돈이었고 나는 이 돈을 아껴서 반은 집으로 송금했더니 아내는 이 돈과 봉급을 모아 2년 후 내가 귀국할 때는 상당한 자금을 저축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생각하며 당시의 우리나라 상황을 짐작한다. 그는 봉급에 송금까지

받았으니 참으로 행복하고 살림도 재미가 있었을 것이다.

 

16. 창립가정으로 동부교회 설립 우리가 마산에 오자 장군동에 살면서 문창교회에 나가며 예배를 드렸다. 마산에서는

제일 큰 교회였다. 양덕지구가 재개발되고 여기로 이사를 하자 문창교회까지는 먼 거리였으나 문창교회로 버스를 타고 출석을 계속했다. 73년 6월 문창교회에서 양덕지구에 있는 교인 최찬석 김삼례 김애자의 세 가정과 임한택목사님을

중심으로 동부교회를 설립케하고 지금의 양재영치과 맞은 편에 20평 정도의 건물 2층을 전세로 얻어 주었다. 동부교회의 창립가정이 된 축복이었다. 이렇게 동부교회가 설립되자 아내는 어려운 교회를 위하여 충성과 봉사를 다하였고 우리가정이 교회와 함께 축복을 받아 오늘의 우리가정으로 발전했다.

 

17. 어머니의 믿음 여자의 믿음 --'일포(逸浦)의 후예들'에 올린 아내의 글-- '어머니', 그 얼마나 부르고 싶은 이름이며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이름인가! 우리는 세상에서 여자로 태어났다. 그리고 어머니로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참 행복하고 또 여자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다. 이름 모를 들풀 하나, 잡초에 핀 작은 꽃 하나, 또 가지 끝에 부는 한 가닥 실바람이나 무심히 뜬 한 조각 구름에도 흔들리는 여리고 고운 마음의 여자로 나는 살고 싶다. 여자는 일생을 사랑하며 살아간다. 한 남자를 사랑하고 자녀와 교회를 사랑하며 이렇게 평생을 아내로 어머니로 사랑하며 살아간다. 사랑 그것은 우리 여자들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믿음의 어머니가 계셨다. 권사로 시골교회를 섬기며 10리 길 교회를 멀다않고

걸어서 다녔으며, 일 많은 농가의 생활 속에서도 기도와 찬송을 끊지 않으셨고, 밤눈이 어두워 해만 지면 더듬으면서도 예배나 심방시기에는 캄캄한 시골길을 호롱불 하나로 연자를 앞세우고 다니시고, 더러는 웅덩이에 더러는 논바닥에

빠져 신발과 옷을 적셔 오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한 영원히 잊지 못할 어머니의 기도 음성!

매일 밤마다 자녀들 위해 애절하게 간절하게 눈물로 엎드려 간구하시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예수 믿는 사위

아니면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욕심으로 저희들을 결혼시켰으나 넉넉지 못한 생활과 건강이 안 좋아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음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을 어머니 앞에 보이고 싶다. 우리가족이 창립한 마산의 큰

교회에서 장로로 권사로 봉사하는 우리의 모습을 어머니 앞에 보이고 싶다. 하지만 어머니의 믿음을 생각하면 나의 믿음은 부끄러울 뿐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믿음을 닮고 싶고 어머니의 행하신 믿음대로 살고 싶다.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바른 여인처럼, 못 박히시는 십자가 밑에까지, 또 무덤까지 찾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난

여인들처럼,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여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가 되고 싶다. 여자의 믿음, 어머니의 사랑은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믿음과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신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 이제 한 혈통과 어머니의 위대한 믿음을 이어받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사랑과 믿음의 생활로 남은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여 먼 훗날 천국에서 부모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움 없는 자녀가 되게 우리의 옷깃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여미어야 되겠다.

 

셋째. 장학사, 교감(아내 41세-44세)

1. 진해에서 (지해교육청 41세-44세) 마산고등학교 교사에서 진해교육청 중등계 장학사로 승진발령이 났다. 승진한 초임으로 좋은 곳으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집에서 통근을 할 수 있었고 중등계 장학사 2명이 지금은 마산으로 들어간 북면 대산 수정 반동 진동 진전 용잠 등을 함께 관리해야하는 책임이 중한 곳이었다. 교장이 되려면 교감의 경력이 있어야 하므로 2년 후 진해교육청에서 가까운 진해동고등학교 교감으로 발령이 나서 1년간 교감의 경력을 쌓았다.

 

2. 경남도교육청(44-48세) 전천수교육감님이 오신 후 나에게는 경사가 겹쳐서 장학사로 승진이 되었고 교감경력 1년 반이 된 89년 3월 교육경력의 꽃이라고 하는 경상남도교육청의 장학사로 발령이 났다. 영전을 위해 힘을 쓴 것도 아닌데 참으로 의외의 깜짝 놀랄 영전이었다. 당시로는 외국유학이 매우 드문 경력인데 전임 교육감으로부터 도외시 된 것에 대한 현 교육감님의 시위 겸 보상이었다. 나의 영광이 아내의 영광이니 아내의 기쁨도 컸다. 장학사로서 나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의 채점과 합격사정 및 학교배정의 방대한 작업을 지금까지 수작업으로 처리하던 것을 처음으로 전산화하여 서울과 부산에 이어 경남이 어려운 입시업무를 전산화했다. 4년간의 중등교육과 근무는 좋은 경험을 쌓았고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또 그들을 도와줄 수가 있어서 좋았다. 출장을 아내와 함께 가기도 하면서 나도 그도 매우 보람있는 40대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 중등교육과에 있을 때 우리는 첫째와 둘째 딸을 시집보내며 우리의 큰일을 시작했다. 자녀의 혼사는 부모로서는 가장 큰 일인데 아내는 주변의 도움으로 무사히 두 아이의 혼사를 치렀다. 도교육청 장학사 4년을 근무하고 83년 50세의 나이에 고등학교 교장이 되었다. 넷째. 교장(아내 48세-63)

 

1. 진교에서(진교농고 48세-50) 83년 3월 나는 50세의 나이로 대망의 교장이 되어 진교농업고등학교에 부임했다. 사택에서 지나며 학교의 차로 운전도 배워 남 먼저 차를 샀다.

 

2. 고성에서(고성농고 50세-54세) 나는 두 번째 학교로 고성농고의 교장으로 가게 되었다. 고성은 나의 아내의 고향이요 처가의 곳이다. 하동의 진교에 비하면 모든 것이 좋은 조건이다. 아는 곳이요 마산이 가깝고 학교도 모든 면에서 좋았다. 농고 교장으로 제법 관록이 쌓여 산과 농지를 사 서 목장을 만들고 젖소 30두를 사 들이고 축사와 실험실 관리실 등 네 개의 큰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일을 했다. 큰 사택에 살며 아내가 자주 찾아왔다. 사택에 부속된 텃밭이 있어서 항상 채소는 풍부했다. 살던 아파트를 팔고 새 아파트를 사기까지 약 10개월 동안 아내가 사택에 와서 함께 살기도 해서 아내는 고향 땅에서 살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거리에서나 시장에서 그의 초중고 동창들도 자주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3. 창원에서(신월중 55-56세) 90년 3월 창원의 신월중학교로 옮겼다. 아내는 창원에 두 개의 대지를 가지고 있었고 용호 호수 옆에 있는 롯데아파트를 구입해 전세를 놓고 있었다. 아직도 창원은 개발 중 이었고 교육이나 상업과 교통에서 마산에 많이 뒤떨어지고 있던 때다. 나의 근무지가 창원으로 되자 그는 자주 창원에 오더니 건축 중이던 토월 성원아파트 40평형을 친구와 함께, 우리는 303동에 그의 친구는 304동에 분양을 받았다. 큰 단지라 건축이 오래 계속되면서 우리 두 사람은 자주 건축현장을 둘러보며 그 아파트가 잘 되기를 고대하고 희망에 찼었다. 아니나 다를까 창원은 날로 발전하여 마산을 앞서 나갔다. 우리가 입주한 토월 성원아파트는 마산 창원 전체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아파트가 되었고 특히 우리가 사는 303동은 앞쪽 전망이 좋아 3년 후에는 값이 두 배가 되었고 지금은 4배가 되어있다. 항상 그가 하는 일에는 행운이 따랐고 그는 언제나 인기와 친구와 행운을 달고 다녔다. 4. 마산에서(합포중 55세-58세) 나는 거주지가 마산이라 신월중학교 1년 반 만에 마산 합포중학교 교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경남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을 때인데 여기서 강숙이와 강욱이를 결혼시켜 우리 두 부부가 해야 할 큰 일 즉 네 자녀의 혼사를 다 마쳤다. 큰일을 마치고 우리는 가볍게 창원의 40평형의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처음으로 40평의 아파트에 살게 되어 여러 가지가 좋았으나 직장이 마산이라 불편함도 있었다.

 

5. 반송여자중과 퇴임(58-63세) 합포중학교 교장으로 3년의 근무를 마치고 94년 9월 나는 새로운 거주지인 창원에 있는 반송여자중학교 교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정년 4년 앞둔 나의 마지막 직장으로 선택한 곳이다. 이 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교사 19.5년 교감 1년 장학사 5.5년, 교장 15.5년으로 총 42년 반의 세월이었다. 관리직으로 오래 있으면서 선생님들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지만 경쟁적인 성적향상이나 출석률 청소 질서를 강조하지 아니하고 감사나

장학지도를 위해 교사나 학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아니하여 편안한 학교분위기를 만드는데 힘쓴 것은 보람으로 남는다. 학교교육에서 군사문화를 배격하며 전교생의 노래 부르기를 실시하고 자율과 자치를 강조하는 경영을 했다. 교직 42.5년에 한 번도 뇌물을 써본 적이 없고 16년이란 긴 교장생활 속에서 학교의 사고 한번 없이 무사히 교직을 마쳤으니 영광이었다. 술 잘 먹고 교제 잘하는 사람이 성공하던 시대에, 전형적인 교사타입으로 자기실력만 믿고 살아온 내가 이렇게

형통하게 지날 수 있은 것은 아내의 내조의 도움이 컸으며 그런 속에서 그는 나를 대견스럽게 생각했고 우리는 항상

서로 사랑하며 행복했었다. 많은 사람의 축하 속에 떳떳하게 퇴임식을 하고 인생의 큰 한 단원을 마쳤다.

 

다섯째. 그가 만든 즐거운 가정 1. 3무의 가정 76년 9월의 정기 인사에서 단 2명의 교사가 승진하여 나는 진해교육청

장학사로 발령이 났다. 교육감님의 배려가 있은 것이다. 다시 2년 반이 지나 진해동고등학교 교감으로 근무할 때

경남도교육청의 장학사로 발령이 났다. 역시 교육감님의 특별한 배려로 난 발령이었다. 내가 원하거나 힘 쓴 것도 아닌데 발령이 났으니 너무 의외의 영전이었다. 76년에는 교육감님을 만나 나의 처지를 설명드리고 부탁은 했지만 뇌물은 쓰지 않았다. 평생을 살면서 우리 가정에 3무 즉 세 가지가 없는 것이 있다.

가. 늦잠 자지 아니 했다. 평생을 통해 아내도 나도 날이 새면 일어난다. 전날에 늦게 자는 경우가 있어도

아침에 날이 새면 일어났다. 늦잠을 자지는 아니했다.

나. 빚을 지지 아니 했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월급을 가불하거나 동료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통해 가불을 하거나 빚을 지지 아니하고 살았다. 단 한번 아내가 수술을 했을 때 부모님 돈과 가불로 처리하고 곧 갚았으니 이것을 빚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 뇌물을 쓰지 아니 했다. 교사 장학사 교감 교장이 되면서 나의 승진과 영전은 모두 순조롭게 풀려 나갔다. 외국유학의 경력이 도운 셈이다. 이 신분변동의 과정에서 뇌물을 쓴 적이 없다. 그 시대에서는 드문 일이지만 사실이다. 뇌물이 아닌 예의에 알맞은 사후 감사의 선물은 했다.

 

2. 계모임 사회성이 뛰어난 아내는 친구들 사귀는데 특별한 소질이 있었다. 마산에 오자 강숙이를 유치원에 보냈고 그때는 비교적 부유한 유치원 어머니들과 자주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정보를 얻어 양덕에 있는 공무원 아파트를 분양 받아 처음으로 내집 마련을 했다. 공무원아파트에서는 친한 친구들을 중심으로 19일계를 결성하여 30여 년간 모이고 있다. 동창생 부인들 모임과 교장부인들 모임도 생겼다. 한 달에 네 번이나 다섯 번 이상의 모임이 항상 계속되었다. 아내는 친한 친구 4-5명이 항상 주변에 있었고 모임에 나가면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는 것을 본다. 하늘나라 가기 2개월 전까지 세 개의 모임에는 참석했는데 11월의 경남아파트 계는 멀리 경주 자연의원에서 참석했고 12월의 19일계는 듬밑동에서 참석했다. 모임에 참석하면 병중에도 아픔을 잊고 즐겁게 지날 수 있을 것이기에 차를 운전하는 나도 기쁘게

갔다 올 수 있었다. 12월의 마지막 모임 때는 "오늘 계모임에서는 기침도 안하고 몸도 안 아파서 참 잘 지났다."고 하며 만족했다. 투병 중에도 가시기 두 달 전까지 친한 사람들과 모여 놀수 있었다는 것이 친구가 많은

그에게는 큰 축복이었다.

 

3. 동물사랑 동물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좀 특이하다. 개나 닭 금붕어를 보고 사람에게 하듯 말을 걸고 특별한 정을 쏟는다. 개는 세 번을 키웠으나 정이 든 후의 처리가 어려워 키우지 않았다. 금붕어는 여러 해 동안 키웠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어항에 가서 "잘 잤나? 추웠지."하면서 금붕어에게 말을 건다. 나는 아이들에게 "너희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에게는 인사를 안하고 금붕어에게 '잘 잤나?'하고 먼저 인사한다."하고 놀려 주곤 했다. 개에게도 닭에게도 먹이를 주며 "많이 먹어라." 등 말을 건다. 금붕어는 키우다가 열대어 구피로 바꾸었다. 열세 마리로 시작한 구피는 어떻게나 정성들여 키웠던지 수 백 마리로 늘어났다. 배부른 암놈을 지켜보며 아침에 일어 나 새끼를 낳았으면 너무나 좋아했다. 큰놈이 새끼를 잡아먹는다면서 못 잡아먹게 분리 시켜가며 정성을 드려 키워서는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항의 보온관리나 물의 관리는 나의 몫이다. 이 구피를 자녀들에게도 나누어 주어 기르고 있는데 아들 집에서는 새끼를 낳아 많은 숫자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가 기르던 것이라 오래 잘 키웠으면 좋겠다고 나 혼자 바라고 있다.

 

4. 농담과 장난 내 나이의 동료 남자들은 대부분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다. 나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이지만

가정에서는 열려 있고 매우 가정적인 셈이다. 집에서는 언제나 농담이 있고 장난도 친다. 창녕에서는 네 식구가 들로

산으로 자주 놀러 다니고 집안에서는 작란도 첬다. 내의를 입고 있는 아내나 딸들의 아래 내의를 당겨 내려서 엉덩이가 들어나게 만들었고 그랬더니 의자 위에서 벽에 못을 치는 아빠의 아래옷을 딸들이 당겨 내려 나의 엉덩이가 들어나기도 했다. 한때는 우리 가족이 헐렁한 아래옷을 입고 일어설 때는 언제나 손으로 옷을 잡고 일어서야 했다. 농담도 많이 한다. 농담이 가정을 웃음으로 만드는 요소가 되었고 거짓말로 딸들이 부모를 속여 아버지 엄마를 낭패가 되게 하기가 예사다. 그래서 하는 말을 믿지 않고 항상 의심부터 해 보아야 했다.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남들이 들어서는 안 될 진한 농담

짓궂은 짓도 자주하면 그는 눈을 흘기지만 듣지 않고 한차례 맞아야 끝이 난다. 농담과 장난은 즐겁고 열린 가정이 되게 하는 묘약이었다.

 

5. 드라이브 여행 내가 교장으로 승진한 83년에 자동차 운전면허를 받아 승용차를 몰기 시작했다. 상당히 일찍 한 운전이었고 마산의 길도 고속도로도 차가 밀리는 일이 없었다. 우리 부부는 자주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했는데 3-4시간에 다녀오는 거리를 매우 자주 함께 나갔다. 아내는 시골 장을 둘러보며 농산물 사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시골장이 있으면 찾아갔다. 고속도로 보다는 시골길을 다녔고 시골마을과 경치를 보며 가다가 졸리면 차를 세우고 잠깐 자고 다시 운전했고 우리는 차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로 둘이서 이야기하며 다니는 시간은 매우 행복한 시간이었다.

 

6. 이사와 재산형성 마산에 오자 우리는 시청 근처 장군동에서 2년간 전세로 살았다. 허허 벌판이던 양덕지구에 공무원아파트가 건립되어 분양이 어려웠는데 73년 내 집 마련을 위해 이 아파트로 입주했다. 처음으로 마산에서 내 집을 마련한 셈이다. 신마산의 전세 돈으로 분양을 받고 가까운 합성동에 대지도 하나 샀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시외주차장이 오고 양덕은 마산의 중심이 되어 아파트의 값은 10배도 더 올라 가고 대지의 값도 올라갔다. 아내는 더 넓은 단독주택이 좋다면서 새로 개발되기 시작하는 구암지구에 단독주택을 사서 이사를 했다. 구암지구는 한국전력만 있고 주변은 한산하던 곳이었는데 아파트가 건립되고 고속도로 IC등 많은 변화가 생기자 아내는 구암의 집을 팔고

합성동의 대지에 2층의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구암의 집을 팔면서 큰 이득이 생겼다고 그가 여러 번 말했다. 집을 팔고 새 집을 사는 과정에서는 그의 친구들의 정보와 권유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시 이사한 곳이 마산의 전화국 앞에 있는 경남아파트인데, 이 아파트의 건설업자의 부인이 아내의 통영여고 동창이었다. 그때는 경남아파트가 인기가 있어서 정실분양의 말썽이 나기도 한 것으로 분양받기가 어려웠으나 아내의 노력으로 분양이 되었고 이것을 두 배의 값으로 팔아

창원의 40평인 성원아파트로 다시 이사를 했다. 30평 아파트가 40평으로 되었으나 값은 같은 가격이었다. 창원이 개발되고 있을 때라 넓은 평수의 싼 아파트로 간다고 산 것인데 3년 후에 창원과 마산의 집값이 역전되고 모든 것이 다시 행운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창원의 초창기부터 대지 두 필지를 헐값에 사서 갖고 있었고 인기가 좋은 용지호수 옆의

롯데아파트를 분양받아 7년간 전세주고 있었다. 지금 우리의 재산은 없는 돈으로 싼 곳을 찾아 이사한 아내의 예지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졌다. 동부교회가 가장 어려울 때 교회를 앞장서서 섬긴 그에게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인데

믿지 않는 사람은 이것을 운이라고 한다.

 

7. 성경필사 그는 글씨가 좋아 속필이고 달필이다. 글씨가 좋지 않은 나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한문의 실력도 대단할 뿐 아니라 한자도 아주 잘 쓴다. 그 나이의 여자들로 한자를 그 만큼 아는 사람이 드물다. 성경필사를 시작하더니 바쁜 사람인데도 시간이 나는 데로 필사를 하더니 신구약 전체를 두 번 필사해 보관 하고 있다.

 

8. 해외여행 그는 해외여행을 자주 갔다. 친구들이 많아 함께 가기 때문에 남자인 나는 따라갈 수가 없었고, 11번의 여행 중에 태국여행과 북유럽 여행, 그리고 뉴질랜드 여행은 함께 다녀왔다.

가. 일본 여행(95.5.10-5.15) 나가사기

나.호주,북뉴질랜드여행(96.3.14-18)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뉴질렌드 마오리 원주민

다. 태국1차 (97년)

라. 대만, 홍콩, 싱가폴.(01.3.19-26) 홍콩 상하이 은행

마. 태국 캄보디아 (01.3.10-) 태국 캄보디아 2차여행

바. 유럽여행(02.4-5.1) 폼페이 유적지 런던 브릿지

사. 장가계 원가계 만리장성 장가계 원가계 입구 만리장성 위에서

아. 뉴질랜드 04년 1월 밀포드 사운드에서 던히던 시내

자. 북유럽

차. 이집트 중동 터키06.5.23 이집트 스핑크스 보스포러스 해협 터키 이스탄블

카. 금강산 여행(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