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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광해군의 심화 2012년 4월 12일 목요일 오후 09:57

생활상식

by 수호자007 2012. 4. 12.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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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과 광해군의 심화

     사람이 한 생을 사노라면 화(火)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 반드시 성취되리라 기대했던 대망이 실패로 좌절되거나,

     - 뜻밖의 횡액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될 때는 심화(心火)가 치밀어 주체를 못 한다.

     - 재앙으로 말미암은 재산상실이나 가족과의 사별, 일생을 좌우하는 취직시험의 낙방,

     - 시기·모함에 따른 현직 중도 하차, 명운을 걸어 올인했던 선거에서의 패배.

       이럴 때 마음속의 화를 잘못 다스려 낙심하면 폐인이 되거나 병이 도져 죽기도 한다.

 인간의 심화를 다스리는 방편을 두고 역사적으로는

   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재위 1494∼1506)과

          제15대 임금 광해군(재위 1608∼1623)이 크게 대별된다.

   두 사람 모두 권력의 최고 정상인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 폐주(廢主) 신세가 된 뒤 유배지에서 한을 품고 분사(憤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이 절망의 극한 상황에서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는 전혀 달랐다.

  왕위 오른 연산군 무자비한 살육

제9대 성종은 원비 공혜왕후 한씨(영의정 한명회 딸)가 일찍 승하해 계비로 윤씨(연산군 생모)를 맞았는데

 - 어찌나 성질이 못되고 질투가 심했는지 폐비시키고

 - 끝내는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 성종은 다시 같은 문중의 윤씨(정현왕후·중종 생모)를 계비로 앉혀 세자 연산군을

. 이때 세자 나이 4세였다.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생모로 알고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궁궐 안에서 대소신료들의 떠받듦 속에

  세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 천성이 나태하고 포악했지만 그를 막아서는 어려움이나 뜻대로 안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대궐 안을 걷다가 미물 곤충이 지나가면 얼른 쫓아가 발로 비벼 죽였다.

- 엄격하게 왕도 교육을 시키는 스승 조지서를 향해 “나중에 임금이 되면 목을 쳐 죽이겠다”고 별렀다.

 부왕 성종은 수심이 깊어갔다. “저런 인성으로 어찌 억조창생을 보살필 것이며 앞날에 닥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겠는가. 만에 하나 어미가 비명에 죽어간 걸 알면 조정의 피바람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로다.” 성종은 세상을 떠나며 생모 윤씨의 사사와 폐비 사실을 100년 동안 발설하지 말라고 유언으로 남겼다.

 성종의 우려는 어김없이 적중했다. 연산군은 보위에 오르자마자

- 세자 시절 임금 교육을 혹독하게 한 조지서를 참수해 사제지도를 짓밟았다. 어머니의 분통한 죽음을 뒤늦게 안 그는 이와 연관된 대신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거나 모진 고문으로 육신을 못 쓰게 만들었다. 심지어는 부왕의 두 후궁과 이복동생마저 끔찍한 방법으로 처형해 흔적조차 없애 버렸다. 미색이 반반한 전국 기생들을 불러 모아 주지육림으로 밤을 지새우며 국고를 탕진했다.

가슴속 울화로 유배 석달만에 숨져

 지나친 것은 부족한 것만도 못한 법이다. 연산군이 왕위에 있은 지 12년 되던 해 반정이 일어났다. 그는 폐위돼 강화도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로 쫓겨 가 위리 안치됐다. 외딴 섬에 갇혀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된 연산군은 모든 게 원망이고 탄식이며 한숨이었다. 하루도 안 돼 폐주의 가슴속엔 울화가 치밀며 생불이 치솟았다. 극도의 불안 속에 분을 삭이지 못하고 삶의 의지마저 잃다 보니 음식 맛은 소태보다 썼다. 폐주 연산군은 그곳에서 석 달 만에 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제15대 임금 광해군도 연산군과 함께 임금 자리서 쫓겨나 유배지서 죽긴 마찬가지였는데 출생신분·성장배경·유배과정이

전혀 다르다. 부왕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 차남인 서자 신분으로 태어나 왕자 취급도 못 받으며 자랐다. 서자 출신으로 보위에 오른 선조는 자신의 보령 40이 넘고 광해군 나이 18세가 되도록 세자 책봉을 하지 않았다. 서자 임금인 탓에 잘난 대신들로

부터 당하는 무시와 자격지심이 가슴 아파 왕위만은 정비 출생의 대군왕자로 잇고 싶었던 때문이다.

 이럴 즈음 임진왜란(1592)이 터져 선조는 중신들의 주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됐다. 광해군은 분조(分朝)의 중임을 맡아 삼남지역을 순회하며 부왕을 대신해 왕권을 나눠 행사했다. 세자는 임진·정유재란의 7년 전쟁을 치러내며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참담한 굶주림과 짐승만도 못한 고초도 견뎌냈다.

명나라 조정에서 서자 세자를 폐하라 한 수모도 감수했다.

 전쟁이 끝나자 임금은 변했다. 전쟁터를 돌며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세자를 멀리하고 나이 어린 계비(인목왕후 김씨)를 새로 맞아 적통 왕자(영창대군)까지 낳았다. 조정에서 광해군을 폐세자하고 두 살 먹은 영창대군을 새로 책봉하자는 분란이 일 무렵 선조가 갑자기 승하했다.

광해군, 폐세자 주청 무리 살육-숙청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먼저 시행한 왕권은 폐세자를 주청한 무리를 살육하고 반대파를 숙청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내쫓아 골방에 가둬 불을 때 쪄 죽이고 계비 인목왕후는 서궁(덕수궁)에 유폐시켜 방치했다. 이복동생

정원군(추존 원종·인조의 생부)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대가의 명당 판정에 겁을 먹고 그의 셋째 아들 능창군을 유배 보내 자결토록 했다. 이런 임금을 조정 대신과 백성이 수수방관할 리 있었겠는가.

 능창군의 형 능양군(인조)이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은 폐주돼 왕위에서 쫓겨났다. 폐주는 강화도로 유배가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되뇌었다. “내 어떤 곤경과 굴욕도 참아내 기필코 용상에 다시 앉을 것이로다. 어떤 고통인들

임진·정유재란의 참혹함보다 더하겠는가.” 조정에서는 광해군도 연산군처럼 곧 죽을 것으로 판단했다. 모든 것을 가졌던 자가

모든 것을 잃으면 공망심을 이기지 못해 곧 죽는다는 이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기필코 재기 꿈꾸며 절치부심

 그러나 광해군은 달랐다. 강화에 유배된 세자가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 사사당하고 세자빈이 자결했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조정에선 폐주를 태안에 이배(移配)했다가 멀리 제주도로 격리시켰다. 배소를 감시하는 별장이 광해군을 ‘영감’이라

부르며 아랫목을 차지하고 윗목으로 밀쳐도 겉으로는 순응하며 절치부심했다. 그는 배소를 전전한 지 18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천수를 누린 67세로 재위는 15년이었다.

 연산군 묘(사적 제362호)는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 77번지에 자좌오향(정남향)으로 부인 거창 신씨와 함께 쌍분으로 있다. 대를 이을 후손은 없지만, 외조부(세종대왕 4남 임영대군) 음덕으로 햇볕 잘 드는 양지바른 음택지에 이장됐다.

반면 광해군 묘(사적 제363호)는 부인 문화 유씨와 쌍분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 59번지에 해좌사향(동남향)으로 영면해 있다. 묘 앞이 낭떠러지인 절손지지(絶孫之地)로 산(山) 감옥이나 다름없다. 역사를 통해 복위되지 못한

두 임금은 능이 아닌 묘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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