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추석의유래 2012년 10월 1일 월요일

생활상식

by 수호자007 2012. 10. 1. 09:28

본문

 

 추석의 유래

한국 4대 명절의 하나인 음력 8월 15일

중추철, 가배, 가위, 한가위라고도 한다.
한해 농사를 끝내고 오곡을 수확하는 시기으므로 명절 중에서 가장 풍성한 때이다.
-유래-
고대사회의 풍농제에서 기원했으며 일종을 추수감사절에 해당한다.

추석의유래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유리왕 때 6부의 여자들을 둘로 편을 나누어 두 왕녀가 여자들을 거느리고 7월 기망부터 매일 뜰에 모여 밤 늦게도록 베를 짜게 했다. 8월 보름이 되면 그 동안의 성적을 가려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 대접했다. 이때 회소곡이라는 노래와 춤을 추며 놀았는데 이를 '가'라고 불렀다.

고려시대에도 추석 명절을 쇠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국가적으로 선대 왕에게 추석제를 지낸 기록이 있다.

1518년(중종 13)에는 설, 단오와 함께 3대 명절로 정해지기도 했다.

추석의 유래와 의미
추석의 유래는 지금부터 약 2000년전 유리왕 때부터라고 합니다.
유리왕은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살기를 바라는 ‘도솔가’를 지어 부르게 하였고
여러 가지 산업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 한가지로 유명한 것이 길쌈이라는 것이었지요.
유리왕은 길쌈을 장려하기 위하여 6부의 부녀자들에게 내기를 시켰답니다.
부녀자들을 두 패로 나누고 궁중의 왕녀 중 두 사람을 뽑아 두 패를 각각 거느리게 한 다음
해마다 7월 부터 한 달 동안 베를 짜게 하고 8월 보름이 되면 어느 편이 더 많이 짰는지를 심판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7월이 되면 부녀자들은 두 왕녀의 응원을 받으며 열심히 베를 짜기 시작했고
임금이 지어 준 도솔가를 흥얼거리면서 밤을 낮삼아 열심히 짜다 보면 8월 보름은 금새 닥치는 듯하고
마침내는 저마다 마음을 졸이며 그동안 짜놓은 베를 가지고 내기 장소에 나왔답니다.
유리왕과 왕비를 비롯한 궁중의 관리들이 나와 유리왕이 판결을 내리면
이긴 편에서는 환성을 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고
진 편에서는 그동안 별미 음식을 만들어 이긴 편을 대접하였답니다.
맛있는 송편, 기름에 지진 고기, 전 등 갖가지 별식과 밤, 대추, 머루, 다래, 배 등이 푸짐하게 마련되면
양편은 모두 둥그런 원을 그리며 둘어 앉아 함께 먹으며 노래와 춤을 즐긴 것이지요.
어두워지면 밤하늘에 둥근 달이 떠오르고 갖가지 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밤을 보냈답니다.
서라벌에서는 이날 8월 15일을 가베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한가위’라는 신라의 큰 명절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 온 것이랍니다.
오늘날 추석은 한 해 동안 농사한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님께 감사의 차례를 지내고 달맞이를 하면서
여러 민속놀이를 즐기는데 이런 풍습을 다루어 봄으로써 전통 문화를 자연 스럽게 익혀나가는 기회를 주시기를 바라면서
다음의 개념들을 익힐 수 있도록 해봅니다.
- 추석은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이다.
- 추석에는 여러 가지 민속놀이가 행해진다.
- 추석에는 민속의상인 한복을 입는다.
- 추석에는 조상들께 햇곡식과 햇과일로 차례를 지내는 날이다.
- 추석에는 특별한 음식이 있다.
- 추석에는 온 가족의 만남이 있다.


추석의 풍속
추석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으로는

벌초(伐草)·성묘(省墓)·차례(茶禮)·

소놀이·거북놀이·강강 수월래·원놀이·

가마싸움 ·씨름·반보기·올게심니·밭고랑 기기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벌초와 성묘
추석에 조상의 무덤에 가서 여름 동안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베어 주는데 이를 벌초라 한다. 옛날 조상의 묘를 풍수설에 의한

명당에 쓰기 위하여 몇 십리 먼 곳에까지 가서 쓰는 수가 많았고, 또 묘를 쓴 다음 이사를 가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묘가

집 근처가 아니라 먼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추석을 맞이하여서는 반드시 벌초를 하는 것이 효성의 표시와 도리로 여겼다.
한가위 때에 성묘를 와서 벌초를 안했으면 보기에도 흉할 뿐만 아 니라 불효의 자손을 두었거나 임자 없는 묘라 해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차례
추석 이른 아침에 사당을 모시고 있는 종가(宗家)에 모여 고조(高祖)까지의 차례를 지낸다. 차례 지내는 절차가 설날과

다른 것은 흰떡국 대신 메[밥]를 쓰는 점이다. 조상에 대한 추원 보본(追遠報本)과 천신제(薦新祭)를 겸하였기 때문에 제물은 신곡으로 만들어 진열된다. 고조 이 상의 윗대는 10월에 시제라 해서 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소놀이
추석날 차례를 마치고 난 뒤 알맞은 시간에 소놀이는 진행된다. 먼저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농악대가 풍물을 울리면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상쇠의 선도에 따라 한바탕 신나 게 풍물을 울리며 어우러져 놀다가 소놀이가 시작된다. 두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그 위에 멍석을 뒤집어 씌우며 뒷사람은 큰 새끼줄로 꼬리를 달고, 앞사람은 막대기 두 개로 뿔을 만들어 소의 시늉을

한다. 소를 끌고 농악대와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부농집이나 그 해에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람의 집으로 찾아간다.
대문 앞에서 '소가 배가 고프고 구정물을 먹고 싶어 왔으니 달라'고 외치면 주인이 나와서 일행을 맞이한다. 소를 앞세우고 일행은 앞마당으로 들어가 농악을 치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면 주인집에서는 술과 떡과 찬을 차려 대접한다. 마을 사람들은

한참 놀다가 다시 소를 끌고 다른 집으로 향한다. 이렇게 여러 집을 찾아가 해가 질 때까지 어울려 논다. 소놀이를 할 때는 당년에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집 머슴을 상머슴으로 뽑아 소등에 태우고 마을을 돌며 시위하는 경우도 있다.

농사를 천하의 대본으로 여겨 온 농경 민족에게 있어 농사를 잘 지어 풍작을 거두게 하였다는 것은 큰 공이니 위로하고 포상하는 뜻에서 소에 태우는 영광을 주는 것이다. 한번 상머슴으로 뽑히면 다음해 머슴 새경을 정할 때 우대를 받게 된다.

원놀이·가마싸움
옛날 서당교육은 훈장을 초빙해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명절이 되면 훈장도 고향에 가서 차례 성묘를 하게 되므로 서당은 며칠을 쉬게 되고 학동들은 자유롭게 놀 수가 있었 다. 이럴 때에 학동들에 의해서 원놀이와 가마싸움이 있게 된다.

원놀이란 학동들 중에서 공부를 많이 했고 재치있는 사람을 원님으로 선발하고 나머지 학동들 은 백성이 되어 원님께 소장을

내어 그 판결을 받는 놀이인데, 오늘날의 대학에서 행해지는 모의 재판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 이 때에 현명하고 지혜로운 원님은 사건을 잘 해결하지만 서투른 원님은 백성들의 놀림감이 된다. 장차 과거에 등과해서 벼슬을 하고 백성을 다스려야 할 학동들의 놀이로서는 매우 적격이었다.
가마싸움도 학동들이 주가 되어 행하여졌다. 훈장이 없는 틈을 타서 가마를 만들어 이웃 마을 학동들과 또는 이웃 서당의 학동들끼리 대결을 하는 놀이이다. 가마를 끌고 넓은 마당에 나아가 달음질해서 가마끼리 부딪혀 부서지는 편이 지게 되는데 이긴 편에서 당년에 등과가 나온다고 한다.

반보기
추석이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끼리 일자와 장소를 미리 정하고 만나는 것을 반보기라 한다. 옛날에 시집간 여자들은 마음대로 친정 나들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녀 사이에 중간지점을 정해서 서로 즐기는 음식을 장만하여 만나 한나절 동안 그 동안 나누지 못했 던 회포를 푸는 것이 반보기인 것이다.
또 한 마을의 여인들이 이웃 마을의 여인들과 경치 좋은 곳에 집단으로 모여 우정을 두터이하며 하루를 즐기는 수도 있다. 이 때에 각 마을의 소녀들도 단장하고 참여하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며느릿감을 선정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반보기란 중로 (中路)에서 상봉했으므로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올게심니
추석을 전후해서 잘 익은 벼, 수수, 조 등 곡식의 이삭을 한 줌 베어다가 묶어 기둥 이나 대문 위에 걸어 두는데 이것을 올게심니라고 한다. 올게심니를 할 때에는 주찬(酒饌)을 차려 이웃을 청해서 주연을 베푸는 수도 있다. 올게심니한 곡식은 다음해에 씨로 쓰거나 떡을 해서 사 당에 천신하거나 터주에 올렸다가 먹는다. 올게심니를 하는 것은 다음해에 풍년이 들게 해 달라 는 기원의 뜻이다.

밭고랑 기기
전라남도 진도에서는 8월 14일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벗고 자기 연령 수대로 밭고랑을 긴다. 이 때에 음식을 마련해서 밭둑에 놓고 하는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그 아이는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밭농사도 잘된다는 것이다.
추석은 시기적으로 곡식과 과일 등이 풍성한 때이므로 이즈음에는 여러가지 시절 음식이 있다. 차례를 지내기 위해서 제찬을 준비하는데, 설날의 제찬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추수의 계절 이라 햇곡식으로 밥과 떡, 술을 만든다. 철이 늦은 해에는 미리 밭벼[山稻]를 심었다가 제미(祭米) 로 쓰는 일도 있다. 이렇게 햅쌀로 밥을 지으면 맛이 좋고 기름기가 있으며, 떡도 맛이 좋다.

추석의 대표적 인 절식으로는 송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송편 속에는 콩·팥·밤·대추 등을 넣 는데, 모두 햇것으로 한다.

열나흗날 저녁 밝은 달을 보면서 가족들이 모여 송편을 만드는데,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며, 잘못 만들면

못생긴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 해서 처녀, 총각들은 송편을 예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또 임신한 여자가 태중의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 인지 궁금할 때에는 송편속에 바늘이나 솔잎을 가로넣고 찐 다음 한쪽을 깨물어서 바늘의 귀쪽이 나 솔잎의 붙은 곳을 깨물면 딸을 낳고 바늘의 뾰족한 곳이나 솔잎의 끝쪽을 깨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이를 점치기도 한다. 특히 올벼로 만든 송편은 올벼 송편이라 부른다.

추석의 차례상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것이 바로 술이다. 추석 술은 백주(白酒)라고 하는 데, 햅쌀로 빚었기 때문에 신도주(新稻酒)라고도 한다. 추석 때는 추수를 앞 둔 시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풍족해진다. 사람들의 인심 또한 후해서 추석 때에는 서로 술대접을 하는 수가 흔하다.
또 이 때의 가장 넉넉한 안주로 황계(黃鷄)를 들 수 있는데, 봄에 알을 깬 병아리를 길러서 추석 때가 되면 잡아 먹기에 알맞게 자란다. 또 옛날에는 명절에 어른에게 선사하는 데에 닭을 많이 썼다. 친정에 근친하러 가는 딸은 닭이나 달걀꾸러미를 가지고 갔으며, 경사가 있을 때에도 닭을 선물했으며,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손쉬운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특히 사위가 찾아오면

장모는 닭을 잡아 대접하는 일이 흔했다.
녹두나물과 토란국도 추석의 절식이다. 녹두나물은 소양(消陽)한다고 하지만 잔치상에 잘 오르고,

토란은 몸을 보한다고 해서 즐긴다
신라 유리왕이 왕녀 두사람을 시켜서 6부의 여자들은 반으로 나누어 7월 보름달부터 6부의 뜰에 모여 베를 짜는데,
을야에 이르러서야 헤어지곤 했다. 이렇게 하길 8월 보름날까지 하여 그성적을 평가하여 진편에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을 대접했다. 이때 노래하고 춤추며 온갖 놀이를 다 했는데 이를 '가배'라고 했다.
이 '가배'가 오늘늘 한가위라는 뜻의 '가위'에 해당하는 그 당시 한자의 음차표기로 가을의 초추, 중추, 종추
3달로 나누었을 때, 음력 8월이 중간에 들어가는 가을의 가운데 '중추'의 우리말 표기이다.

즉, '한가위'는 (한- 크다)라는 뜻과 '가위'라는 (가위- 가운데) 가운데라는 뜻이 모여 8월의 한가운데 있는 큰 날이라는 뜻이다.
추석의 놀이 : 강강술래
추석의 대표적인 음식: 송편

제사와 차례는 엄밀히 이야기해서 조금 차이가 있다. 그러나 추석은 제사였지 차례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설날이나 추석, 한식 등 명절에는 조상에 차례를 지낸다고 한다. 차례를 말할때 한자로 다(茶)례로 쓰고 읽기는 <차례>라고 한다. 차마시는 다도는 같이 차다(茶)를 쓰면서 <다>라고 읽는다. 그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 유사한 사례로 수레차(車)를 수레거(車)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37대 선덕왕이후 일년에 여섯 번 5묘에 제사지냈으니, 곧 정월 2일·5일, 5월 5일, 7월 상순, 8월 1일·15일이었다. - 삼국사기 제사 신라

요즘 드라마 <선덕여왕> 때문에 오해가 있는 분을 위해서 신라의 제사기록은 27대 선덕여왕이 아니고, 780년 37대 선덕왕때 일이다. 신라는 1년에 6번의 제사를 지냈는데 그중 8월 15일 한가위 날에도 제사를 지냈다. 일본승려 엔닌의 기록이나 수서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에게는 8월 15일은 지금의 광복절 만큼 중요한 날로 기념하고 있다. 추수감사제로 중요한 날이 이날

하필 전승기념일까지 겹쳤다면 겹경사가 아닌가? 만약, 8월15일 광복절이 음력 8월15일이 되었다면 안봐도 DVD가 아닐까한다. 
 
중국 중추절은 신라 진평왕의 고구려 승전기념일? 글에서 <삼국사기>를 근거로 중추절은 진평왕의 603년 8월 대고구려 북한산성전쟁이나 668년 가을 고구려의 멸망을 기념하는 전승기념일이라고 주장했다.
엄밀히 이야기해서 제사와 차례는 다르다. 하지만 요즘은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특정인을 기념할때는 제사라고 하고, 조상신 전체를 대상으로 할때는 차례라고 하는 듯하고, 상차림과 행사전반을 <차례>라고 구분하는 듯하다. 하지만

옛 조상들은 엄밀하게 구분하여 지낸것 같다.  
왕실이나 양반들은 조상의 묘에 특별히 제사와 묘를 관리하는 <수묘인>을 두었는데, 이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와

<수묘인>의 생활과 음식장만 등 전반적인 묘관리소를  <재실>이라고 불렀다. 왕실에서는 녹을 받은 관리를 두고 왕릉을 보살피고 <전답>에서 나온 물품으로 제사를 치르고 하였다. 
  
제사와 차례를 구분해서 사용하였다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특별히 제사말고도 차례만을 지낸 기록이 보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차례만 지낸때는 언제일까? <동지다례>라고 해서 동짓날만 다례를 지낸다. 동지에 다례를 지내는 이유는 겨울의 끝이고, 태양이 가장 낮은 곳에서 떠오르는 첫날이며, 실질적인 당해년의 시작과 전년의 끝이다. 그러니 새롭게

시작한다해서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깨끗한 물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것이 아닐까한다. 산천에 제를 지내는 것은 제왕이

만이 할수 있는 일이다.
어찌 되었던, 새해의 시작이란 의미가 강하고, 동지때가 되면 먹거리가 떨어질때 이니 하늘맞이로 차릴것은 없으니 차례로 대신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벽사의 의미가 강하지 않았을까한다. 민가에서의 <정안수>떠 놓고 하늘에 비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보성의 차밭이 유명하지만 처음 차가 들어와 재배된 시기은 신라시대 말엽이 아닐까 한다. 물론, 차와, 다례예법은 그보다 오래 되었을 것이다. 도교 선의 용도로 사용되어진 차가 불가의 선종과 결합하여 다예가 되고 다도(차도)가 되었다. 그런 많은 사람들은 <차도(다도)>를 산사의 암자에서나 선을 행하면서 먹는 것으로 치부를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차마시는 것을 일상처럼 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다례를 검색하다 보면 수천개의 <다례>기록이 나온다.  태종 이방원이 태상왕인 이성계와 차마시기 기록으로 부터 철종때까지 차마시기에 관한 무수한 기록들이 널려있다. 외국사신과 차마시기를 했다. 신하와 차마시기를 했다. 왕이 신하의 집을 방문해서도 차마시기를 즐겼다고 한다. 조선이 불가에서 널리 퍼진 차문화을 억압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또한,

<차마시기>가 억불숭유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고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한다.

제사가 차례로 바뀐 이유? 
최소한 손님이 찾아오면 차마시기가 일상사였을 것이다. 요즘 사극을 보면 무조건 손님이 찾아오면 술마시는 것을 그리고

있지만, 술상보다 먼저 차를 대접한다. 그러니 사극에서 안주인이나 노비들에게 "주안상을 내와라" 하는 술마시고 놀자판으로

그리는 것은 고증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자주 목격되는 장면중 여러사람이 모여있으면 차를 마시는 장면이나 다기들이 테이블위에 자주 

등장한다. 물론, 당시에는 드라마 선덕여왕처럼 화려한 칠보채색자기는 등장하면 안되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던 조선시대 제사는 손님이 찾아오는 것 만큼 일상사이다. 그래서 차례란? 제사가 흔함의 자조섞인 말의 변형이 아닐까?
최근에는 많이 변하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명절이나 제사를 준비하는 건 여인들의 몫이였다. 지금도 며느리들이 명절날 시집에 가서 제사상이나 차례상을 차리고 나면 명절증후군이 생긴다. 이시기를 지나면 부부간에 금이 가는 수가 많고, 이혼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명절은 우리내 어머니이고, 며느리, 누나 동생인 여성들에는 힘들고 힘든 고역이 된다.

제사, 차례 상차림


예전에 종가집이나 어느정도 산다는 집은 1년에 지내는 제사가 수십차례이니 일상의 <차마시기> 만큼 흔하디 흔했다. 

차를 내오는 것만큼 그집 안주인에게는 흔한일이고 한번의 제사를 지낼려면 수일은 준비해야 하니 일년중에 50~100일은 제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요즘은 제사가 많이 줄고 단촐해 졌다. 처자들이 종가집 장손이나 일반 적으로 맏아들에 시집을 가려하지 않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사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중에 하나였다. 그렇지 않다면, 제사가 차례가 될 이유가 없지 않을까 한다. 며느리들의 자조적인 말이거나 종손들의 자조섞인 제사상이 차례상으로 변형 되었을 것이다. 
 
또한 제사에 참여해야하는 사람도 차마시기 정도에 지나지 않을 만큼 <일상사> 정도로 치부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않을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르신들이 아랫사람들에게 조상을 손님맞이하는 것처럼 성심과 정갈하게 하라는 뜻일 지도 모른다.

어려운듯 하지만 쉽게 정성으로 지내라는 의미일수도 있다.
추석, 한가위, 중추절 처럼 모든 문화 유래에는 한가지로만 이루워진 것이 없고,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융화되어서 생긴것이니 한가지로 유래를 찾는것은 맞지 않는것 같다. 
위에서 언급을 했지만 시대에 따라 명절의 내용과 형식이 바뀌고 있다. 남성들이 여성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면, 명절날

스스로 음식이나 설거지 등에 적극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한다. 그것이 명절이후 벌어진 명절증후군에서 쉽게 벗어나고 가정이 화목해지는 길이 아닐까 한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