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의종 때 '무신(武臣)의 난' 간신(奸臣) 무참하게 도륙했지만 문극겸 등 충신(忠臣)은 화 면해
1170년(고려 의종24) 8월 어느 날 고려 수도 개경에 피바람이 불었다.
오랫동안 누적돼 온 무인(武人)들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화근은 재위 24년을 맞고 있던
의종(毅宗· 1127~1173)의 황음(荒淫)과 측근 문신 및 환관들의 노골적인 무신(武臣) 무시 때문이었다.
무장(武將)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의종은 수박희(무술대련)를 열어 후한 상을 내림으로써 그들을 위로하려 했다.
사단(事端)은 엉뚱한 데서 터졌다.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수박희 도중 힘에서 밀려 달아나자
(무술대회 아니면 씨름으로 추정)
의종의 총애를 받던 종5품 문신 한뢰(韓賴)가 나서 이소응의 뺨을 때렸다.
이를 지켜보던 의종과 측근 문신들은 손뼉을 쳐가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대장군 정중부를 비롯해 주변에 있던 무장들의 안색은 하얗게 변했다.
정중부가 앞으로 나서 한뢰에게 소리쳤다. "소응이 비록 무신이기는 하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모욕을 이다지 심하게 주는가?"
일단 의종이 나서 정중부의 손을 잡고 위무(慰撫)했지만 여러 해 동안 계속돼 온
무신 모독에 대한 무신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의종은 보현원으로 들어갔고 남은 신하들이 귀가를 위해 문밖으로 나서자
이고
이의방
등 정중부의 핵심부하들이 행동에 들어갔다.
최초의 희생자는 우부승선(조선의 우부승지) 임종식과
어사대(조선의 사헌부) 지사 이복기였다. 이들은 늘 의종과 함께 배를 띄워 종일토록 술 마시고 놀던 인물들이었다.
난(亂) 발발 소식이 전해지자 의종보다 더 놀란 인물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앞서 무신을 희롱했던 한뢰이고
또 한 사람은 좌승선(조선의 좌승지) 김돈중(金敦中)이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아들이기도 한 김돈중은 초급관리 시절 아버지의 배경을 등에 업고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뢰는 친한 환관의 도움을 받아 의종의 침상 아래에 숨었다. 정중부가 한뢰를 밖으로 내보낼 것을 청하자
한뢰는 의종을 옷을 붙들고 한사코 나오려 하지 않았다.
결국 이고가 칼로 위협하자 밖으로 나온 한뢰는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났다.
김돈중은 개경을 겨우 탈출해 경기도 감악산에 숨어지내다가 현상금을 탐낸 하인의 밀고로 붙잡혀 무참하게 살해됐다.
이후 진행과정은 역사책에서 자주 소개되는 그대로다.
그날 하루에만 50여명의 문신과 환관들이 죽었고 이후 문신도륙이 진행돼 '고려사'는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 피의 보복에서 벗어난 문신들이 몇명 있다. 평소 의종에게 직언을 해 고초를 겪기도 했던
문극겸(文克謙)은 도망쳤다가 군사들에게 붙잡혔다. 이에 문극겸은
"나는 문극겸이다. 주상께서 만일 내 말을 따르셨다면 어찌 오늘의 난이 있었겠는가?
원컨대 예리한 칼로 단번에 내 목을 베어다오"라고 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군사들이 문극겸을 장수들 앞에 데려갔고 여러 장수가 "우리가 평소에 이름을 듣던 자이니 죽이지 말라"고 했다. 이후 문극겸은 명망있는 문신들 여럿을 구했고 자신도 병부판사(조선의 병조판서) 등 고위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난이 끝나고 왕위에서 쫓겨난의종은 남쪽으로 유배를 가면서
"내가 진작 문극겸의 말을 들었던들 어찌 이처럼 욕을 당하겠는가?"라며 때늦은 후회를 했다.
외교의 달인 서희(徐熙)의 현손(玄孫)인 서공(徐恭)도 고위직에 있었음에도 평소의 덕망으로 목숨을 건진 경우다.
이름처럼 공손한 성품의 서공은 오히려 문신들의 오만방자함을 비판하고 무인들을 예우했기 때문에
정중부는 직접 순검군 22명을 보내 서공의 집을 호위케 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해주었다.
의종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승선(조선의 승지) 노영순의 경우에는 본래 집안이 무관이었고
그로 인해 여러 무관과 친했기 때문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때 목숨을 구한 노영순도 재상에 해당하는 평장사에까지 오른다.
한편 무신(武臣)세상을 열어준 장본인인 의종의 말로는 비참했다. 숨죽이고 있던 의종은
9월 1일 사람들을 모아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의종은 왕위를 내놓고 거제현으로, 태자는 진도현으로 추방당했고 태손은 살해됐다.
명종 3년(1173) 8월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當)이 의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난은 실패로 돌아갔고
다시 한번 개경에서는 문신 도륙이 진행됐다. 거제에서 경주로 옮겨졌던
의종은 같은 해 10월1일 그곳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 근처에서 이의민에게 무참하게 살해돼 연못에 던져진다.
普賢院의 칼바람
인종 때는 실로 다사다난(多事多難)하던 시절이었다. 이자겸의 난이 평정되자 다시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나는 등
재위 이십사년동안 어지러운 풍진(風塵)속에서 날을 보내다가 인종이 등극한지 이십사년 이월,
삼십팔세란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원자되는 현(晛)이 왕위를 이었으니 곧 제십팔대 의종(毅宗)이다.
의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도 잘 읽었으나 성격이 경박하고 유흥을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부왕 인종과 모후 임씨는 그 앞날을 염려해서 왕위를 둘째 왕자 대녕후 경(大寧侯暻)에게 물려 주려고 한 일이 있었다.
이때 태자시독으로 있던 정습명(鄭襲明)이 한사코 두호해서 겨우 왕위 계승자의 위치를 상실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정습명은 영일현(迎日縣) 사람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학문을 즐겼다. 일찍이 등제하여 내시가 되었다가 인종조에 태자시독으로,
태자 즉 의종의 교육에 전력을 다한 노신이었다. 그리고 인종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특히 태자를 불러
“네가 장차 대통을 계승하여 나라를 다스릴 때 반드시 습명과 의논하여 처결하도록 하라.”
이런 분부까지 했다. 말하자면 정습명은 의종에겐 은인인 동시에 엄한 스승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왕위에 오르게 되자 습명을 한림학사를 삼았다가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승진 시켰으며 처음 얼마동안은
그의 충고를 곧잘 들었다. 그러나 차차 날이 감을 따라 놀기 좋아하는 왕에게는 말많은 노신이 귀찮게만 여겨졌다.
그리고 김존중(金存中), 정함(鄭諴) 등 간사한 무리가 부채질을 하기도 하므로 왕은 정습명을 멀리 할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정습명이 마침 병으로 눕게 되었다.
“뭐라구? 그 늙은이가 병이 들었단 말이지? 그거 마침 잘 됐군!”
왕은 즉시 습명의 직책을 김존중으로 하여금 대행케 했다.
김존중은 용궁군(龍宮郡) 사람으로 몹시 약삭빠른 인물이었으며 인종 때에는 춘방시학(春坊侍學)이 되었으니,
춘방이란 곧 태자의 교육을 맡아 하는 곳이었다. 이때 김존중은 정습명과 같이 딱딱하게 굴지않고 태자의 비위를 맞추어
유흥에도 잘 어울려 다녔으므로 왕이 즉위하자 대단히 그를 사랑하여 형부낭중(刑部郎中) 등의 요직을 맡기었다.
병석에 누운 정습명은 김존중이 자기 관직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말을 전해 듣자 땅을 치고 통곡했다.
“상감께서 옳은 말을 물리치시고 김존중 같은 간사한 무리를 가까이 하시니 결국 모두 다 올바르게 보필하지 못한
내 죄라, 장차 무슨 낯으로 선왕의 영을 대하리오.”
그리고는 마침내 독약을 먹고 자결해 버렸다. 그러나 왕은 이런 은인의 죽음을 조금도 슬퍼하지는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귀찮은 존재가 없어지니 이제는 마음놓고 유흥에만 빠질 뿐이었다.
왕의 곁에서는 날로 충신이 멀어가고 간신들만 모여들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자는 정함이란 자였다. 정함은 원래 환관이었는데 의종의 유모가 그의 아내였던 관계도 있고 해서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왕이 즉위하자 갑제일구(甲第一區)를 받았으며, 벼슬도 권지 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에 이르렀으니,
환관으로서 조관(朝官)에 열석하기는 예로부터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대관은 그 부당성을 강경히 항의했지만
왕은 듣지 않고 더욱 총애할 뿐이었다.
정함의 권세는 날로 강해져서 요직에는 자기 친지들만 들여 앉히고 강직한 신하들은 모조리 쫓아냈다. 그리고 날이면 날마다
놀기 좋아하는 왕의 마음을 선동해서 산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술과 노래와 춤으로 날을 보내게만 했다.
때마침 마라 안에는 한발과 악역(惡疫)이 뒤를 이어 일어나 백성들의 고통은 말이 아니었으나 간신들에게 둘러싸인 왕은 그것에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고 자기 향략을 추구하기에만 바빴다.
산수 좋은 곳이 있단 말만 들으면 즉시 그 곳에 정자를 짓게 하고 주연을 베풀었다. 그러나 향락을 추구하는 자들에게서
흔히 보듯이 왕도 한 가지를 오래 즐기지를 못했다. 또 다른 데 경치 좋은 곳이 있단 말만 들으면 곧 그 곳에 새로 정자를 지어
옮겨가고 해서 정사는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워지고 국가의 재정은 탕진될 대로 탕진되었다. 왕은 얼마나 사치를 좋아했던지,
건물을 지으면 기둥은 황금으로 온통 씌우고 벽은 값진 비단으로 발랐다고 한다.
또 강물에 띄우고 노는 조그만 유람선에도 돛을 비단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왕의 취미는 유흥과 함께 사원에 많은 금품을 기부하는 일이었다. 여기에도 수많은 국가 재정이 탕진되었다.
그러니 백성들은 나날이 올라가는 세금에 허덕이고, 쉴 새 없는 부역에 피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암흑정책이 오래 갈 까닭이 없었다. 어디서 터지든지 곪은 종기는 터질 날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원래 무관 출신이어서 무관을 존중하여 요직에 앉혔었지만 세월이 흘러, 나라 안이 평화스러워지자, 차츰 무관은 세력을 잃고 문관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진정한 실력은 무관들이 갖고 있으면서도 항상 문관들의 멸시를 받고 있었다.
특히 의종을 둘러싼 문관들은 앞날을 내다볼줄 모르는 소인들이었으므로 당장 잡고 있는 권세만 믿고 무관들을 한층 학대했다.
왕도 또한 유흥에 관계되는 시라든가 음률에 능한 문관들만 총애하고 무관들은 매우 소홀히 다루었다.
무관들의 불평은 쌓일대로 쌓여갔다.
언젠가 기회만 있으면 실력을 행사하리라 엿보고 있었다. 의종 이십사년, 이때 여러 무관들에게 둘러싸인 왕은
흥왕사에서 보현원(普賢院)으로 가는 도중에 잠시 쉬는 틈을 타서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무관들에게도 관심을 보이는 뜻에서
수박희(手搏戱)라는 무술시합을 하도록 명했다. 이때 무장 이소용(李紹庸)이란 사람도 그 수박희에 참가하게 됐다.
이소용은 무장으로서는 비교적 높은 대장군이란 지위에 있었지만, 몸이 허약해서 수박희 같은 무슬에는 능하지 못했다.
잠간 상대되는 무관과 어울려 보다가 보기 좋게 나둥그러졌다. 이 꼴을 보자 한뢰(韓賴)라는 자가 문관 자리에서 뛰쳐 나왔다.
한뢰는 이복기(李復基), 임종식(林宗植) 등 문관들과 함께 왕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는데 성품이 교만한데다가
시기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왕의 관심이 무관들에게로 쏠린 것을 보자 대단히 불쾌하게 여겼다.
(아무리 일시적이며 장난삼아 하시는 일이라도 이 일을 계기로 왕께서 무관들을 가까이 하시게 되면 어쩌나?
그리고 무관들이 건방지게 문관과 같은 행세를 하게 되면 큰일이다.)
이렇게 혼자 신경을 쓰면 조바심을 하고 있는데 마침 이소용이 수박희를 하다가 너무나 꼴사납게 지고 말았다.
(옳지! 잘됐다, 저걸 핑계삼아 무관 놈들의 기를 꺾어 줘야 하겠다.)
한뢰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소용의 곁으로 다가가서 불문곡직하고 뺨을 때렸다.
“이놈아! 그꼴이 뭐야? 무관이면 무관답게 무술을 닦아야지 수박희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장군입네 행세를 한단 말야?
그러니까 요즈음 무관 놈들은 등신이란 소리를 듣는단 말야!”
한뢰의 행동은 너무나 방자할 뿐 아니라, 보기에 따라서는 무관 전체에 대한 모욕이기도 했다. 그 점이 문관들에게는
오히려 통쾌했다. 이복기, 임종식 등 한뢰의 패거리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렇지! 그거 잘했소! 한공, 등신 같은 무관 놈들은 혼 좀 내줘야 해.”
이 소리를 듣자 무관들은 치를 떨었다. 그 중에서도 무관들 중에 가장 지위가 높은 상장군 정중부(鄭仲夫)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이요? 비록 무관이지만 이공은 종삼품의 고귀한 몸이 아니요? 어디다 함부로 손을 대는 거요?”
정중부가 소리치는 바람에 한뢰를 비롯한 문관들은 약간 겁이 났던지 웃음을 거두고 잠잠해 졌다.
정중부는 해주(海州) 사람으로 용모가 우위하고, 얼굴은 백옥같이 희며 키는 칠척이나 되고 특히 수염이 잘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두려움을 품게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주(州)의 군적(軍籍)에 올랐다가 후에 상경하여 그 용력과 풍채가 재상 최홍재(崔弘宰)의 눈에 들어 금군(禁軍)에
배속되었으며 인종조에는 마침내 견룡대정(牽龍隊正)이 되었다.
이소용이 모욕을 당하는 걸 보고 정중부가 격분한 데에는 공적인 의분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인종 때의 일이었다.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해서 한참 득세하기 시작한 재상 김부식(金富軾)엑 돈중(敦中)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돈중은 혈기왕성한 젊은 몸일 뿐 아니라, 성품이 또한 교만하고 경망해서 자기 부친의 세도를 믿고 촛불로 정중부가
자랑하는 수염을 태운 적이 있었다. 성미가 남달리 괄괄한 정중부가 가만히 있을리 없다.
“이 고약한 젊은 놈! 감히 뉘게가 이런 짓을 하는 거지?”
하고는 돈중을 묶어서 흠뻑 때려 주었다. 돈중은 울며불며 자기 부친에게 호소했다.
아들의 말을 듣자 김부식은 그 경망한 행동을 책하려고는 하지 않고 오히려 정중부의 행동만 괘씸하다고 날뛰었다. 그래서 왕에게 상소하여 정중부를 죽이고자 했으나 겉으로는 김부식의 청을 허락하는 체하면서 뒤로는 정중부를 몰래 도망치게 했다.
그의 사람됨을 아낀 때문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정중부는 문관들을 뼈골에 사무치도록 미워했다.
기회만 있으면 단단 보복하리라 벼르고 있었다.
왕의 일행은 다시 보현원으로 향했다.
어떻게 저 문관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수는 없을까 정중부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견룡 행수산원 이의방(牽龍行首散員李義方)과
이고(李高) 두 사람이 다가 오더니
“장군! 궐기합시다. 아무 힘도 없는 문관 놈들만 배불리 먹고 갖은 사치를 다하는데
우리 무관들은 굶주림에 떨고 멸시만 당하는 이런 세상을 어찌 가만히 둘 수 있소?”
정중부에게는 바라던 말이었다.
“좋아! 해치웁시다.”
그는 곧 심복 하나를 보내어 그 고장 순검군(巡檢軍)을 오게 했다.
드디어 왕의 일행이 보현원에 당도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보자 중부는 무관들을 지휘하여
먼저 이소용을 비웃은 일이 있는 이복기, 임종식 등의 목을 베고 보현원 안으로 뛰쳐 들어 갔다.
이것을 보자 이소용을 모욕한 장본인 한뢰는 대경실색(大驚失色)했다. 미처 도망칠 길이 없어 왕이 앉아 있던 의자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피를 보아 살기등등(殺氣騰騰)해진 무관들은 왕의 처소라고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즉시 한뢰의 목덜미를 잡아내어 한칼에 베었다. 이제 무관들은 완전히 피에 주린 이리떼로 화했다.
문관만 보면 관직의 고하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참살했으니
보현원 안팎은 문관들의 시체로 발들여 놓을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보현원에 갔던 문신들을 참살한 정중부는 곧 이소용, 이의방 등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고
서울로 들어가서 궁중의 문관들을 급습하도록 했다.
이때 문관들은 아무 예측도 못하고 있었으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무관들의 칼날에 쓰러져갔다.
문관들을 참살한 정중부는 마침내 정권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자
“썩은 세상을 바로 잡으려면 썩은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巨濟島)로 쫓아보내고 태자는 진도(珍島)로 쫓아 보낸 다음,
의종의 아우인 익양공 호(翼陽公胡)를 맞아 대통을 계승케 했으니 그가 곧 제십구대 명종(明宗)이며 때는
의종 이십사년(西紀1,170) 시월이었다.
이에 새 임금은 정변에 공을 세운 정중부를 참지정사로 삼았다가 다시 중서시랑, 문하평장사 등으로 승진시커어 일등공신을
삼았다. 그리고 그밖의 무관들에게도 각각 높은 관직을 내렸다. 이렇게 정중부 등의무관 일파가 정권을 좌우하게 되자
무신들 중에서도 거기 불만을 품는 자가 없지 않았다. 명종 삼년 팔월,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金甫當) 등은 정중부 일당을 치고
전왕(毅宗)을 복위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남도병마사로 있던 장순양(張純陽)등도 남쪽에서 호응하여 거제도에 있던
폐왕 의종을 받들고 계림(지금의 慶州)으로 쳐올라 갔다.
이에 정중부는 곧 장군 이의민(李義旼)을 시켜 장순양 등을 치게 하는 한편
동북방면으로 군사를 보내어 김보당 등과 싸우게 했다.
이때 계림으로 향한 이의민은 정중부의 부하중에서 가장 강하고 사나운 자였다.
그는 경주 사람으로 그 부친은 소금장수였으며 모친은 옥령사(玉靈寺)란 절의 종이었다.
그러나 원래 키가 팔척이나 되고 용력이 남달리 뛰어나서 두 형과 함께 고향에서 갖은 행패를 다부렸다.
그 죄로 안렴사 김자양(按廉寺金子陽)이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갖은 형벌을 가했는데 두 형은 옥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갔지만
이의민만은 끝까지 살아 남았다. 김자양은 그것을 장하게 여기어 관군에 편입시켰다. 이로부터 그는 실력을 나타내서
차츰 승진하여 의종 때에는 대정(隊正)까지 되었는데 정중부가 난을 일으키자 재빠르게 거기 가담했다. 그리고 그때 문관을 가장
많이 벤 것도 이의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공으로 장군이 되었다. 계림은 곧 이의민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아직도 지난날
이의민과 어울려 행패를 부리던 파락호(破落戶)들이 남아서 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이의민이 쳐내려 온다는 기별을 받자, 옛정도 있고 또 이 기회에 공을 세워 한몫 단단히 볼 생각도 있고 해서 갑자기
기습으로 장순양 등을 죽여버렸다. 이렇게 되니 이의민은 힘들이지 않고 장순양 일파를 제거했지만 의종이 살아 있는 한 다시
거사할 무관들이 속출할 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의종마저 죽이고 말았다. 한편 동북방면으로 보낸 군대는 마침내 김보당 등을
사로잡았으므로 한달 남짓해서 복위하려던 거사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그 이듬해 정월에는 승병(僧兵)
이천여명이 들고 일어나 정중부 일파를 치려 했으나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구월에는 서경유수 조위총(西京留守趙位寵)이 군사를 일으켰으나 역시 패배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정중부의 권세는 날로 강성해져서 나이 칠십이 넘은 후에까지도 정권을 잡고 물러나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 균(筠)이라든가 사위 되는 송유인(宋有仁) 등까지도 중부의 권세를 믿고 갖은 만행을 다하였다.
특히 송유인의 행패와 사치는 가장 심했다. 송유인은 인종 때엔 보잘 것 없는 관직에 있었으나 그의 아내 덕으로 좋은 벼슬
자리를 딴 인물이었다. 그 아내는 원래 송나라 장사치 서덕언(徐德彦)의 아내였는데 유인은 그 여인을 꼬여
자기 아내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서덕언의 재물까지 가로챘다. 그리고 그 막대한 재산 중에서 백금 사십근을 환관에게
뇌물로 써서 의종 말기에는 대장군까지 되었다.
그러다가 정중부가 난을 일으키자 중부의 총애를 받기 위해서 아내를 먼 섬으로 쫓아버리고
중부의 딸을 다시 아내로 삼은 것이다. 그 후부터 그의 관직은 날로 승진하여 마침내 문하시중이 되고
그 사치한 생활은 왕실을 능가할 정도 였다고
반찬투정시 대응법 2013년 2월 5일 화요일 (0) | 2013.02.05 |
---|---|
투정 2013년 2월 5일 화요일 (0) | 2013.02.05 |
명예퇴직수당 2013년 2월 1일 금요일 (0) | 2013.02.01 |
도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0) | 2013.01.29 |
텔레파시엘로드2013년 1월 28일 월요일 (0) | 2013.01.28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