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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스님일대기 2012년 7월 23일 오후 월요일

생활상식

by 수호자007 2012. 7. 23.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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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 큰스님

 

시주물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 경봉 큰스님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노스님은 사중(寺中)의
물건을 어찌나 아끼는지 구두쇠로 널리 알려질 정도였다.
심지어 공양간에 두고 써야 할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을
극락암 공양간에서는 구경할 수 없었다.
고춧가루통, 깨소금통은 말할 것도 없고 참기름병까지 조실스님이
당신의 방 벽장에 넣어놓고 그날그날 필요할 때만 잠시 꺼내주면서
일일이 관리를 하고 계셨다.

어느날, 통도사의 다른 산내암자에 있던 비구니들이
극락암으로 경봉스님을 찾아뵈었다가 점심공양 때가 되어 공양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공양간에 고춧가루통도,
깨소금통도, 참기름병도 없었다.
한 비구니가 조실스님께 여쭈었다.

“스님요, 고춧가루가 어디 있습니까?”
“고춧가루 예 있다. 너무 많이 치지 마라.”
“스님요, 깨소금통도 안 보이는데요?”
“그래, 깨소금도 예 있다. 조금만 쳐라.”
“참기름도 여기 있다. 한 방울만 쳐라.”
“아이구 스님요 왜 이런 양념까지 조실스님이 방안에다 놓고 쓰십니까?
공양간에 내 놓고 쓰게 하셔야지요.”
“모르는 소리 말거라! 이 귀한 양념들 저놈들한테 맡겨 놨다간
큰 일 난다.일주일 동안 이 참기름을 써라 하고 맡겼더니 이틀만에
다 쳐먹어버렸다. 그래가지고 절 살림 어찌 살겠노?”

그래서 경봉스님은 양념통에 참기름병까지 당신께서 일일이 간수하시며
“적게 써라”, “조금만 넣어라”, “한방울만 쳐라”
노래를 부르듯 하셨다. 시주물로 들어온 것이니 쌀 한톨, 고춧가루 하나,
배춧잎 한 장도 무서워할 줄 알아야 참된 수행자라는게
경봉스님의 가르침이었다.

그러시면서 경봉스님은 법상에 올라가
어느 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일본 조동종의 사찰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기라.
한 수좌가 보자니까, 살림을 맡고 있는 원주 스님이 매일밤
자정쯤 되면 아무도 모르게 무엇을 끓여서 혼자만 먹는 것이었다.
그래, 수좌가 조실스님께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그 말을 들은
조실스님이 그날밤 숨어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과연 원주스님이 한밤중에 혼자 일어나서 남모르게
무엇을 끓여 먹는 것이었다. 그때 조실스님이
‘이 것 봐라, 너 혼자만 먹지 말고 나도 좀 먹어보자’했더니,
원주가 별수없이 먹던 것을 조금 나누어 주었다. 그래 그걸 먹어보니
냄새가 고약해서 먹을 수가 없었어.그래서 조실스님이
‘이게 대체 무슨 음식이냐?’고 원주에게 물었더니, 그제서야
원주가 할수없이 대답하기를 ‘공양주들이 누릉지와 밥풀을 아까운줄
모르고 하수도에 버리니, 그걸 주워다가 끓여먹는 것입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원주소임을 맡았으면 그만큼 쌀 한톨, 밥풀하나라도
귀하고 소중하고 무섭게 알아야 하는기라.
그래서 선문(禪門)의 규범에 이르기를 ‘한 낱의 쌀이 땅에 떨어져
있으면 나의 살점이 떨어진 것과 같이 여기고, 한방울의 간장이
땅에 떨어지면 나의 핏방울이 떨어진 듯 생각하라’고 이른 것이야.“

“묘엄 같으면 얼마든지 캐라”

경봉스님이 머물고 계시던
극락암 대밭 앞에는 절에서 가꾸는 고소밭이 있었다.
‘고소’라는 채소는 스님들이 즐겨 드시는 채소인데 처음 먹으면
빈대냄새가 나서 먹기가 힘들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먹다보면
그 독특한 향기와 맛에 ‘고소’를 다시 찾게 된다.
어느날 극락암에 ‘청담스님의 딸’로 잘 알려진
묘엄비구니가 도반들과 함께 경봉스님을 뵈러 찾아왔다.

“스님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그래. 우짠 일로 왔노?”
“스님요, 고소 몇 뿌리 얻어다 심을까 합니다.
몇 뿌리만 캐가게 해 주이소.”
“고소?”
“예 스님.”
“안 된다.”
경봉스님은 한 마디로 잘라버리셨다.

대밭 앞에 저토록 많은 고소가 있는데 단 몇 뿌리만 캐다가 심겠다는데
일언지하에 안 된다니, 과연 무서운 구두쇠 노스님이 아니신가?
묘엄이 다시 한번 스님께 통사정을 했다.

“스님요, 몇 뿌리만 캐다가 심을테니 허락해 주이소 스님요.”
아직 나이 어린 묘엄이
이렇게 통사정을하자 경봉노스님의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그래? 그럼 어디 내 보는데서 고소를 한번 뽑아 보거라.”
“아이구 감사합니더 스님.”

경봉노스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묘엄은 합장배례하며 감사를 표하고 공양간으로 들어가 식칼을 가지고
나오더니 그 칼로 고소를 캐는게 아니라 그 칼로 대나무 쪽을
쪼개어 끝을 뾰족하게 깎은 뒤, 그 대나무꼬챙이를 고소밭에 콕
찔러서 고소뿌리를 하나씩 솎아 내고 뽑은 자리는 발로 꼭꼭 밟아주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경봉스님이 드디어 빙긋이 웃으시더니
한 말씀 하셨다.

“니 참말로 잘한다.
그렇게 얌전하게 제대로 캐갈라면 한 소쿠리라도 캐가거라.”
“아이구 스님, 우짠 일이십니까?”
“내가 와 안된다고 했는줄 아나? 고소 몇 뿌리만 뽑아가겠다고 해서
허락해주었더니, 호맹이로 지멋대로 파 뒤비놓고 고소밭 다
망쳐놓고들 안가나. 그래서 마 속이 상해서 안된다고 한기다.
그런데 니는 참 아가 됐는기라.
너 같이 그리 얌전하게 뽑아갈라면 얼마든지 뽑아가거라.
요 다음에도 얼마든지 뜯어다 묵어라.”

“아이구 스님 감사합니다.”
“아이다. 하는 짓이 이쁜데 무엇이 아깝겠노.”

경봉노스님은 그런 분이셨다.
제대로 된 수행자에게는 아까울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제대로 되어 먹지 못한 사람에게는 경봉스님은 송곳 꽂을
땅도 허락지 않는 무서운 분이었다.

“너는 30살 되면 환속하겠고, 나는 40이 되면 속환이 되겠고,
또 니는, 5,6년 못 가서 중노릇 그만 두겠다!”

경봉스님은 당신을 찾아온 사미니들에게 인정사정없이 그렇게
단언을 하셨고, 그 무서운 예언은 훗날 모두 사실로 입증되었다.
스님의 예언대로 모두들 환속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경봉스님은 중생들의 미래까지도 정확히 내다보고 계신 셈이었다.

- 윤청광〈논설위원〉 -


▒ 경봉(鏡峰) 큰스님 ▒
1892년 경남 밀양 출생.
1907년 통도사 성해 화상을 은사로 출가 득도.
1911년 명신학교 졸업.
1912년 해담 스님께 비구계 수지. 통도사 강원 수료.
만해 스님께 화엄경을 수학.
1916년 부터 내원사, 마하연, 해인사에서 참선 수행.
1925년 통도사 만일 염불회 창설,
1927년 통도사 극락선원에서 용맹정진하던 중 활연대오.
1932년 통도사 전문 강원 원장, 1935년 통도사 주지,
1941년 조선불교 중앙선리 참구원 (선학원) 이사장,
1953년 통도사 극락선원 조실로 추대,
1973년 매월 첫째 일요일에 정기법회 개최.
1982년 세수 91세, 법랍 75년으로 입적. 저서로 『법해』
『속법해』 『원광한화』등이 있으며, 서도집
『선문묵일점』 『경봉』 『서간집』 『화중연화소식』
『삼소굴일지』『삼소굴소식』 등이 있다.

통도사 군자’이자 ‘영축산 도인’으로 추앙받았던 경봉 스님은 18세에서 85세에 이르는 67년 생애를 소상히 담은

‘삼소굴 일지’를 남겨 후학들에게 길을 제시할 정도로 섬세했던 당대의 선지식이다.


성품 꼿꼿하기가 댓가지 같으면서 더 이상 청정할 수 없는 출가자의 올곧은 모습을 보였던 스님은 자신이 거처하는 방문 앞에

‘삼소굴(三笑窟)’이라는 현판을 붙여놓았었다. 삼소는 과거·현재·미래의 미소인 삼세(三世)의 소(笑)와 과거·현재·미래의 꿈인

삼세(三世)의 몽(夢)을 초탈한 뜻을 간직하고 있으나, 이런 설명을 알아듣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스님은 “삼소의 ‘삼’은 우주의 극수인 3이요, ‘소’란 염주를 목에 걸어놓고 이리저리 찾다가 결국 목에 걸린 것을 발견하고는 허허 웃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자기에게서 한 치도 여의지 않은 자성을 찾아 헤매다가 자성을 깨닫고 나서 허허 웃는 웃음이라는 설명이다.


스님의 방문 앞에 붙여놓은 ‘삼소굴’이란 현판을 통해 영축산 도인을 넘어 당대의 도인이요 선지식으로 추앙받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그런 도인의 세상을 꿰뚫어보는 선지는 수행의 결과임에 분명하지만, 경전을 비롯한 책에서 만들어지기도 했다.


평생 독서량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많았던 스님의 책 읽기는 어린 시절 한학 공부에서 비롯됐다. 189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용국(경봉 스님의 속가 이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해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 독학으로 언문을 깨쳤다. 특히

서당에 다니는 마을 아이들의 어깨 너머로 천자문을 익힐 정도로 어려서부터 공부머리가 남달라, 부모님은 용국이 일곱 살 되던 무렵에 밀양 읍내 한문사숙으로 보내 공부를 시켰다.


이때 만난 스승이 한학자 강달수 선생이다. 스승은 ‘사서삼경’과 ‘명심보감’ 등을 가르치면서 글자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새기게 했다. 이에 용국은 글을 다 배우고서도 “글에 담긴 오묘한 도리와 이치를 깨우쳐야 한다”며 더 배우기를 원했고,

“장차 사람 사는 이치와 도리를 밝히는 선비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유교(儒敎)의 기본 경전으로 사서는 공자의 어록이 담긴 경전인 ‘논어’, 맹자가 써서 7편의 유교 경서로 구성한 ‘맹자’, 삼강령과 팔조목으로 구성된 ‘대학’, 내면적 수련을 통해 참된 인격을 형성하도록 내용을 꾸민 ‘중용’을 말한다.

또 삼경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시경’, 역대 제왕들이 천명의 보존을 위해 지켜야 할 규범을 다룬 ‘서경’, 우주의 원리를 상징이나 수리로 표현한 ‘역경’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 중국 고전에 나온 선현들의 금언과 명구를 편집해 만든 ‘명심보감’

까지 익혔으니, 어린 용국의 책 읽기는 가히 경이로운 일로 인근 동리에서 칭송이 자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열다섯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게 됐고, 생사의 도리를 알고자 무작정 찾은 곳이

통도사였다. 그리고 그 통도사행은 곧 바로 세간을 떠나 출세간의 문으로 들어서는 길이 되었다. 경봉 스님이 어린 시절

‘사서삼경’과 ‘명심보감’까지 거침없이 읽고 새겼던 한문 실력은 출가 후 불경을 익히고, 오도 이후 한시의 율격에 맞게 선시를

쓰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어린 시절 한문사숙에서 공부하며 ‘사서삼경’과 ‘명심보감’을 통달한 경봉 스님은 출가 후 ‘사미율의’, ‘초발심자경문’을 시작으로 내전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그 재능을 알아본 은사 성해 스님의 도움으로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명신학교에 입학해 역사,
지리, 산술 등을 배우기도 했다.


이어 전문강원 대교과에 들어가 ‘능엄경’, ‘금강경’, ‘원각경’, ‘기신론’ 등을 차례로 배울 때 재발심의 계기가 됨은 물론 오도의

인연이 되는 ‘화엄경’을 만났다. 경봉 스님은 ‘화엄경’을 처음 접하면서 만해 한용운 스님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대교과에서 이 경전을 가르쳤던 스승이 만해였고, 만해로부터 월남의 사례를 들으며 나라 없는 설움이 무엇인지 알게 됐던 것이다. 당시 스님은 나라와 민족에 눈을 뜨면서 ‘조선 백성들에게 지혜를 심어주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스님은 1913년 강원 대교과를 졸업한 이후로도 혼자 공부를 이어가면서 수많은 경전을 탐독했고, 그 중에서도 대교과를 수료한 그해 겨울 내내 방대한 ‘화엄경’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푹 빠져 지냈다. 특히 입법계품 가운데 선재동자가 미륵보살을

만나 보살행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마음의 준비가 보리심이라는 대목에서는 마치 자신이 미륵보살 앞에 선 선재

동자가 된 듯한 법열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경전 공부에 매진 중이던 경봉 스님은 은사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절 사무를 보면서도 경전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어느 날 습관처럼 펼쳐든

‘화엄경’에서 ‘종일수타보(終日數他寶) 자무반전분(自無半錢分),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어치의 이익이

없다’는 대목을 보는 순간 그 구절이 불화살이 되어 머리에 꽂혔다. 경전이 비록 구절마다 진리의 말씀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처님의 보배이지 자신의 보배가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에 들어서면서 더 이상 그대로 안주할 수 없었다.


결국 스님은 ‘경전공부만 공부가 아니요, 참선공부만 공부가 아니니 종무소 사무 보는 것도 다 공부’라는 스승의 말에도

불구하고, ‘일대사를 해결하겠다’는 발심으로 은사조차 모르게 통도사를 떠나 제방의 선지식을 만나며 가행정진을 이어갔다.


본래 이름이 ‘대방광불화엄경’인 ‘화엄경’은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을 그대로 설법한 경전으로, 법계 평등의 진리를 증오한 부처님의 만행과 만덕을 찬양하고 있는 방대한 분량의 경전이다. 내용이 너무 방대해 이 경전을 다 읽고 헤아리는 이가 많지 않았으나, 경봉 스님은 이 경전을 통해 수행문에 들어서는 두 번째 발심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확철대오의 순간을 맞이한 것도 ‘화엄경’과의 인연에서 시작됐다. 제방에서의 정진을 마치고 통도사로 돌아온 스님은

조실 해담 화상의 허락을 받아 ‘화엄경’을 설하는 법회인 화엄살림법회를 열었고, 법회 시작 1주일이 지난 12월13일 새벽 2시

반경 바람 한 점 없는 새벽에 갑자기 촛불이 춤추는 것을 보고 확철대오, “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 나타났네.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담바라 꽃의 빛이

온 누리에 흐르네”라는 오도의 노래를 읊었다. 수행을 통해 견처를 얻은 후 확철대오의 순간을 화엄살림법회 때

맞았으니, 스님의 ‘화엄경’ 사랑이 맺은 결실이라 할 만하다.

경봉 스님은 졸음과 망상을 쫓기 위해 겨울 내내 입에 얼음을 물고 수행했고, 통도사 안양암에서는 자결할 각오로 6개월 동안

누에고치처럼 들어앉아 정진하는 등 상상을 초월한 수행 끝에 36세 때 야반삼경에 촛불이 춤추는 것을 보고 홀연히 대도를

성취했다.


경봉 스님이 이처럼 치열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화엄경’의 한 대목에서 재발심한 연후 찾은 양산 내원사에서 본 한 권의

책이 이미 불붙은 구도열에 열기를 더했기 때문이다.


내원사에서 경허 선사의 제자 혜월 스님에게 참선 공부를 청했을 때 혜월은 경허선사가 직접 엮은 ‘선문촬요’를 꺼내들고

첫 장에 나오는 달마 ‘혈맥론’을 펼친 뒤 손가락으로 한자 한자 짚어 가면서 읊조리고는 뜻을 새겨보라 일렀다. 처음 머뭇거리던 경봉이 만족할 만큼 뜻을 밝혀내자 혜월은 그 자리에서 책을 내주며 마저 읽을 것을 권했다.


혜월은 경봉을 내원사 강백으로 삼을 마음에 누구에게도 빌려주지 않던 책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역효과(?)였다. 밤새 책을 본 경봉은 ‘선문촬요’의 골수와 같은 달마 ‘혈맥론’에서 ‘참선 공부를 하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가르침에 이르러 “

깨달음을 이뤄 부처가 되겠다”는 다짐을 확고히 하고, 새벽녘 조용히 내원사를 떠나 해인사 선방으로 향했다.


경봉 스님의 구도열에 기름을 부은 겪이 된 ‘선문촬요’는

조선 말기 대표적 선승 경허 선사가 편찬한 우리나라 불교 선학의

지침서로 불리는 책이다. 2권으로 구성된 책 가운데 1907년 운문사에서 처음 펴낸 상권에는 달마대사의 ‘혈맥론’, ‘관심론’,

‘사행론’을 비롯해 홍인대사의 ‘최상승론’ 등 중국 고승 찬술 13편이 수록되어 있다. 또 1908년 범어사에서 개간한 하권은

보조국사 지눌의 ‘수심결’, ‘진심직설’, ‘권수정혜결사문’, ‘간화결의론’과 천책의 ‘선문보장록’ 등 한국 고승들의 저술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선가에서 필독서로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해인사 선방을 시작으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던 경봉 스님은 어느 순간부터 선방에서 정진하면서도 선어록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화두에 억지로 매달리지 않고 병난 사람이 의사 처방전을 받아 약을 먹듯, 조사 스님들의 선어록을 먼저 보기로 한 것이다. 이때 ‘선요’, ‘서장’, ‘보우선사 어록’, 중국 운문문언 선사 어록을 담은 ‘운문록’ 등에서 정진을 이어갈 큰 용기를 얻기도 했다.


때문에 스님은 훗날 ‘깨달은 후 보임을 잘 하라’는 용성 스님의 편지를 갖고 온 수좌에게 “이 우주 자연에서 근본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소상히 밝혀주고 나아가 어떻게 하면 이 참마음을 밝혀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는 내용이니,

하룻밤 잠을 못자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글은 반드시 보라”며 ‘선문촬요’에 담긴 내용 중 ‘진심직설’ 읽기를 권했고,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1946년 대중의 간청으로 선학원을 찾았을 때도 ‘선문촬요’와 ‘수심결’, ‘반야심경’을 설법했다.


후학들에게 “깨닫겠다는 집착을 버리고 무심히 구름이듯 바람이듯 어디에도 걸리지 말고 중답게 수행할 것”을 당부했던 스님은 1982년 7월17일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 

 

아미타불을 어찌 멀리 구하는가>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담발화 꽃빛이 온누리에 흐르누나

 

우리의 목숨이 한 백 년을 살지라도

이 마음 못 보면 한갓 꿈 속의 일이다

아미타불을 어찌 멀리 구하는가

이름도 나와 같아 눈앞에 있는 것을

 

마음 속에 들끓는 번뇌탁을 벗어 버리니

본래대로 내 모습 의연 하구나

돌원숭이 춤추고 진흙소 웃으니

이 경지를 보고 아는 이가

그 몇이겠나

 

경봉스님은 사찰에서 화장실을 지칭하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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