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스칸은 어떻게 죽었는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황제를 칭하던 당해 년도(1368년)말에 조서를 내려 편찬한 <<원사(元史)>>의 기재에 의하면, 징기스칸의 죽음은 아주 분명하다.
1. 중병이 들어 치료하지 못하여 죽은 것이다. "(1227년) 가을 7월 임오, 상태가 좋지 않았다. 기축, 살리천사로도의 행궁에서 붕어하였다" <<원사>> 편찬의 총책임자인
송렴(宋濂)은 단순한 20글자로서 일대의 영웅의 사망과정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글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후세인들에게 명확하게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려주지 못하고 있다. 몽고의 민간전설에는 여러가지의 설이 전해지고 있다.
징기스칸의 죽음에 대하여는 대체로 5가지 견해가 있는데, 대부분이 서하(西夏)와 관련이 있다.
낙마설
그중 가장 전통적인 것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원사>>에서 채택한 "낙마설"이다
몽고인이 편찬한 <<몽골비사>>(권14)의 기록에 의하면 "징기스칸이 거주지에서 겨울을 나고 당올(唐兀)을 정복하고자 하였다. 새로 군마를 점검하고 개해가을이 되어서 당올을 정벌하러 갔다. 부인 야수(也遂)도 함께 따라갔다. 가을에 아아불합(阿兒不合)에서 사냥을 했다. 징기스칸이 홍사마를 탔는데, 야생마에 놀라서 징기스칸이 말에서 떨어져 발목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하여 삭알아합척에서 막사를 만들었다. 다음 날 야수부인이 대왕 및 여러 관리에게 말했다: '황제가 오늘 밤 열이 많으니 너희들이 상의하라'"
"당올(唐兀)"은 당시 몽고인들이 서하인들을 부르는 것이고, 개해는 송이종 보경2년 즉 기원1226년이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실은 1226년 가을 징기스칸이 부인 야수를 데리고 서하를 정벌하러 갔다. 겨울에, 아아불합이라는 곳에서 사냥을 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가 탄 홍사마는 야생마 한 필에 놀라서, 아무런 준비도 없던 징기스칸이 말에서 떨어져 상처를 입었다. 그날 밤에 높은 열이 났다. 1227년 7월에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그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왜 말에서 한번 떨어진 것을 가지고 이렇게 깊은 상처를 입었는가?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는 것이다.
당시 야수는 따라온 장령들에게 이일을 어떻게 할지 상의해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서하는 성이 그대로 있어 일시간에 도망갈 수 없으니, 아예 되돌아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나중에 다시 치자고 한다. 징기스칸은 일생을 강하게 살아왔다. 마음 속으로 그렇게 하면 서하인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차라리 서하에서 목숨을 잃더라도 서하를 치겠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징기스칸이 사람을 보내어 서하국의 정세를 정탐하였는데, 마침 서하의 아사감불이라는 대신이 조소하면서 재주가 있으면 쳐들어와보라고 말한다. 징기스칸은 이 말을 듣고 죽어도 병사륻 되돌리지 않겠다고 하고, 하란산을 넘어서 아사감불을 멸해버린다. 그러나, 그 후 징기스칸의 상처는 계속 낮지 않고, 오히려 가중된다. 1227년 음력 7월 12일(양력 8월 25일)에 병사하니 나의 67세때의 일이다. 만일 당시 징기스칸이 회군하였더라면, 이 병으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벼락설"
이 주장은 조금은 황당하다. 몽고에 사신으로 갔던 몽고교황청의 사절인 존 프란노 가비니가 자신의 글에서 쓴 내용이다. 징기스칸은 아마도 벼락을 맞아서 죽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존 프란노 가비니가 당시 몽고에 도착했을 때, 여름에 벼락이 사람을 상처입히는 사고가 빈발했다. "그곳의 흉맹한 천둥과 벼락은 여러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원인으로 몽고인들은 벼락을 무서워했다. 남송의 팽달아가 쓴 <<흑달사략>>의 기재에 의하면 "오랑캐들은 벼락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귀를 막고 몸을 땅바닥으로 굽혀 피하는 동작을 한다"고하였다. 가비니는 포르투갈 사람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간 시간은 확실히 1245-1247년 사이이다. 교황인 이노센트4세가 파견한 것이다. 돌아간 후 교황에게 <<우리가 달단이라고 부르는 몽고인의 역사>>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가빈니가 왔을 때는 징기스칸이 죽은 후 18년밖에 흐르지 않았고, 마르코폴로보다 30년이나 빠르므로, 그의 기재가 아무런 근거가 없지 않을 수 있다.
중독설
이 주장의 근원은 <<마르코폴로여행기>>이다. 마르코 폴로는 13세기 이탈리아 상인이다. 1275년 중국에 도착한다. 그때는 마침 원세조 쿠빌라이가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이다. 그의 여행기에는 징기스칸의 사인을 기재하고 있는데, 서하를 진공할 때 태진(太津, 吉州로 옛날 요새)을 공격할 때, 무릎에 불행히도 서하병사가 쏜 독화살을 맞는다. 결과는 바로 독화살의 독이 심장을 파고들어 상세가 위중해지고 결국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간에는 다른 전설이 있다. 징기스칸이 중독된 것은 서하병사의 화살에 의한 것이 아니라, 포로가 된 서하왕비인 고이백륵진곽알합둔(古爾伯勒津郭斡哈屯)이 독약을 써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서하왕비는 시침하는 기회에 이런 일을 벌였다고 한다.
피자설(被刺說)
이 주장도 위에서 얘기한 포로가 된 서하왕비 고이백륵진곽알합둔과 관련이 있다. 독을 썼다는 버전의 또 다른 버전이다. 몽고민간전설에 의하면, 징기스칸의 군대는 서하를 진공하는 과정에서 병사들이 아주 예쁜 서하왕비를 포로로 잡아서 징기스칸에게 바쳤다. 시침을 드는 과정에서 이 서하왕비는 경계심을 풀고있던 징기스칸을 찌른다. 칼에 찔렸다는 설은 청나라 강희원년(1662년) <<몽고원류>>라는 책에서 나타난다. 이 책은 아주 진귀하다. 100년후, 즉 1766년 몽고 카르카부의 친왕인 청군자부가 예물로 하여 이 책의 수고본을 건륭황제에게 바친다. 건륭은 이 책을 만주어, 한어의 두 문자로 번역하게 하고 서명을 <<흠정몽고원류>>로 한다. 그 후 <<사고전서>>에 수록한다. 징기스칸이 칼에 찔렸다는 주장도 아주 신뢰성이 있다.
생식기를 물렸다는 설
이 주장은 정사에는 기록이 없고, 야사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외몽고인들에게서 전해져 내려온다. 이 풍류사건도 역시 서하왕비 고이백륵진곽알합둔으로 인한 것이다. "흉수"는 당연히 이 아름다운 여인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왕비는 포로가 되어 징기스칸에게 바쳐진 후, 징기스칸은 그의 후궁이 되라고 한다. 왕비는 겉으로는 동의하였지만, 치욕을 참지 못하고, 집안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왕비가 시침을 드는 그 날 밤에 징기스칸의 흥이 최고조에 달하였을 때 그의 생식기를 물어 뜯어버리고, 바로 피가 엄청나게 흘렀다고 한다. 장년에 바깥에서 전투를 벌이던 67세노인이 이런 경우를 어떻게 견뎌나가겠는가. 그리하여 병이 악화되었다. 이 사건은 황제에게 발생한 추문이므로, 숨겨져 왔던 것이고, 대외적으로는 칸이 낙마하여 입은 상처가 악화되었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원래 살 생각이 없었던 서하왕비는, 징기스칸이 그녀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황하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이 설은 황당하기는 하지만, 자세히 분석하면 이치에 맞는다. 만일 징기스칸이 정말 서하왕비의 손에 죽었다면, 칼로 찌르거나 독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침시에는 나체일것인데 어디에 흉기와 독약을 숨긴단 말인가? 설사 흉기와 독약을 가지고 갔다고 하더라도 포로가 된 사람이므로 당연히 몸수색을 당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빈손인 왕비의 가장 치명적인 폭력행위는 당연히 이빨로 남자의 가장 중요한 곳을 무는 것일 것이다.
항상 여자를 조심해야지
최배달(최영의)어록 2012년 6월 8일 금요일 (0) | 2012.06.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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