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개선 위해 실태조사 중인 대전 '쪽방촌'에 가보니>(12.1.)
"도배·장판 해주면 좋지만 손가락 빨고 살 순 없잔아"
쉼표처럼 노파는 앉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손자뻘 되는 기자와 내외라도 하듯 부끄러워했다.
“틀니도 안 꼈는디 뭘 자꾸 물었싸” 손사래 치는 사이로 얼굴에 엷은 웃음이 번졌다.
팔순을 넘긴 할머니는 성이 나 씨였다. 전북 김제에서 났지만 40여 년을 이곳 삼성동 쪽방에서 살았다.
“한 40년 전에 시장 생기고 건물 짓자마자 바로 여기로 들어왔지 아마. 그땐 참 좋았는디...80년대 말인가 삼성시장이
전부 오정동으로 옮겨가면서 이 동네도 같이 다 죽어부렀지. 할아버지도 91년에 먼저 가버리고” 그믐달처럼 패인 두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지난 1987년 11월 개장한 오정동농수산물시장이 생기기 전, 삼성시장은 전국의 청과와 생선, 건어물 등이 집·출하되는 ‘
잘 나가는’ 시장이었다. 사람이 모이고, 돈이 꼬이다보니 자연 시장 뒤편으로 상가 건물이 들어섰다. 시장에서 물건을
떼다 파는 소상인들부터 얼음집, 대포집들이 즐비했다. 현재 삼성동 쪽방의 시작이다.
하지만 삼성시장이 오정동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에 둥지를 틀고 살던 사람들의 명운도 달라졌다. 썰물 빠지듯 사람들의
왕래가 없어지면서 상가도 활기를 잃었고 건물은 서서히 오갈데 없는 이들이 머무는 쪽방으로 변해갔다.
옆에 서 있던 문(68) 씨 할아버지도 말을 보탰다.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일(건축 일용직)을 따라 흘러오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할아버지는 “인제 나이 먹었다고 막일도 안 시켜줘여. 낮에는 의자에 앉아서 햇볕 쬐는 게 일여. 이 골목 사는 사람들
다 나이 먹고 늙었지만 그래도 일거리만 있으면 일할 사람들인데 일이 없어”
할아버지 목소리가 어느새 높아지고 있었다.
김 모(67) 할아버지도 “관청에서 도배고, 장판이고 해준다면 좋기야 좋지. 근데 그거 한다고 먹을 게 생기는 건 아니잖아. 할마시랑 둘이 손가락 빨고 살 순 없는 거 아녀”라고 말했다.
지난 5일부터 대전 동구청과 쪽방상담소, 동구지역자활센터는 원동에서 정동, 삼성동으로 이어지는 쪽방촌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달 중순까지 진행될 조사를 통해 문짝·창호 교체·도배·장판 등 쪽방촌에 대한 환경정비작업을 하고, 담장·옹벽 도색과 조형물 설치 등으로 거주자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계획이다. 대전시는 국·시비 약 14억 원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오는 4월부터 석 달간 건물 보수정비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하지만 삼성동 쪽방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시혜 차원의 단순한 환경 개선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환경정비와 함께 그들이 먹고 살 수 방법을 마련해 주는 것이 근본대책이 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한통운 뒤편의 쪽방촌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온기 하나 없는 냉골에서 전기장판에 의지해 살고 있는 양 모(49) 씨에게 내려진 처방은 ‘도배와 창문수리 요(要)’다.
감기몸살과 혈압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그는 거리에 버려진 소주병을 주워다 팔고 있었다. 방에 쌓인 그것들이 그가 먹고 마신 것으로 생각했던 일반적인‘오해’가 처참히 깨졌다.
쪽방촌 거주자들의 재활의지를 북돋우는 한편, 그들을 술에 취해 있거나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하는 우리들의 비뚤어진 인식에 대한 수정 작업이 선행돼야 하는 이유다. 또 철저한 사례관리로 거주자별 니즈(needs)를 정확히 파악해 맞춤형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대전역 주변에는 현재 1∼4평 내외의 쪽방 건물이 375동, 방은 1500여개가 운집해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약 700명이 이 곳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승현 기자 papa@ggilbo.com
대전역 주변 ‘쪽방촌’에 대한 실태조사와 주거 환경 개선사업이 시작된 가운데 6일 동구청 직원과 상담소 관계자들이
쪽방촌 거주자들의 생활실태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성희 기자 token77@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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